​[최광웅의 데이터 政經] 선거연합이 경제를 살린다

2019-02-14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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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우 정책연합 보장하는 연동형 비례대표제

최광웅 데이터정치경제연구원장


뉴질랜드는 1960년 2차 국민당 정부가 출범했다. 이때부터 국민당은 4기 연속, 12년간 집권에 성공했다. 장기간 지속된 우파정부의 피로감 때문에 1972년 유권자들로부터 외면을 당했으나, 3년 후 곧바로 정권을 되찾았다. 1975년 총선에서 승리한 국민당은 멀둔 총리를 내세우며 또 다시 3기 내리 집권을 이어갔다. 그런데 1978년과 1981년 두 차례는 엉터리 선거제도와 어부지리가 만든 합작품이다. 노동당을 이탈한 세력들이 창당한 사회신용당(현 민주당)은 민족주의 중도좌파를 표방한다. 노동당과 지지기반이 상당부분 겹치기 때문에 사회신용당의 득표율이 커질수록 그 이득은 온전히 우파인 국민당에게 돌아가는 역설이 발생한다. 1978년 사회신용당은 16.1%나 지지를 받았지만 의석은 단 1석(의석율 1.1%)에 머물렀다. 1981년에도 20.7%까지 득표율을 크게 끌어올렸으나 역시 겨우 2석, 의석비중은 2.2%에 그쳤다. 이러한 사회신용당의 손실의석은 고스란히 국민당이 차지하며 노동당보다 더 낮은 득표율로도 과반의석을 획득했다.
 

선거제도 개혁 이전 뉴질랜드 총선결과 [출처=뉴질랜드선거관리위원회(정리:최광웅 원장)]

멀둔 내각은 1973년 국제석유위기 여파라는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보호주의 강화 등 기존 경제기조를 고수하는 정책으로 일관했다. 좌파 노동당 정부와 별다른 차이 없이 보편 연금제도를 유지하는 등 과도한 사회복지비 지출로 재정적자가 급증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부존자원이 풍부해 세계가 부러워하던 뉴질랜드는 저성장, 고물가, 수출부진, 고실업 등으로 천덕꾸러기 신세가 된 것이다. 멀둔 정부(1975~84년) 시기 경제성장률은 1%대, 물가는 살인적인 두 자릿수, 실업률은 0%대에서 4%대까지 20배로 치솟았다. 낙농업을 주로 하는 수출증가율은 플러스 마이너스 성장을 반복하며 국제경기로부터 지나친 의존을 보였다. 9년 만에 1984년 랑이 총리의 4차 노동당 내각으로 정권이 교체됐으나 경제지표는 오히려 더 나빠졌다. 성장률은 아예 0%대, 물가도 여전히 두 자릿수, 실업률은 연평균 9%대로 치솟았으며 수출증가율도 둔화됐다. 3년 만인 1990년 총선에서는 국민당이 다시 정권을 탈환했다. 볼거 총리가 이끄는 4차 국민당 내각이 출범해 성장률은 3%대, 물가는 1%대 수준으로 어느 정도 회복했으나 실업률은 여전히 8%대를 유지했다. 연평균 수출증가율은 3%대에 머물며 사실상 내수경기 진작정책에 의존한 결과였기 때문이다.
 

역대 뉴질랜드 정부 경제성적표 [출처=OECD 및 뉴질랜드통계청, 괄호 안은 평균 (정리:최광웅 원장)]

소선거구제도 아래에서는 거대 정당 둘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는 길밖에 없다. 1984년 9년 만에 정권을 탈환한 노동당은 모든 농업보조금을 폐지하며 국가핵심 산업인 농업경쟁력을 제고하고, 부가세(GST)를 도입해 기초연금과 사회보장 지출을 늘렸다. 하지만 재정팽창정책은 6년 뒤 1990년 총선에서 29석 대 67석으로 대패하고 또 다시 정권을 국민당에게 넘겨주고 말았다. 1990년 다시 정부를 맡은 국민당은 반대로 사회복지지출 대폭 축소와 보건개혁, 그리고 국영기업 민영화 등 세출삭감 프로그램에 착수했다. 공립병원 38곳을 폐쇄하고 심지어 공공주택에도 ‘시장임대료(market rents)’제도를 도입해 적자재정을 절감했다. 1991년 9월 월간실업률 11.2%로 사상 최대를 기록한 고실업률을 개선하기 위해 고용계약법(Employment Contracts Acts)을 통과시키며 노동부문에 대한 규제를 완화시켰다. 그런데 보편 연금제도만큼은 포기하지 않았다. 하지만 만족할 만한 성과는 곧바로 나타나지 않았다. 오히려 역효과가 먼저 나타났다. 랑이 내각 6년 평균 9.2%, 1989년 최고 10.7%에 이르던 실업률은 다소 진정이 됐으나 소선거구제 아래 볼저 내각 6년(1990~96년) 기간 여전히 7.6%로 진정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뉴질랜드 시민사회는 이를 잘못된 선거제도의 문제점으로 인식했다. 1975년, 1978년, 1981년 등 3차례 총선에서 국민당은 유권자의 41.8% 지지만으로 의석은 56.5%를 차지했다. 특히 1978년과 1981년은 국민당은 노동당보다 더 낮은 득표율, 겨우 30%대 지지에도 불구하고 정권을 차지했다. 국민당 정부는 오만에 빠져 기존 정부가 주도하는 케인즈주의를 수정하지 않고 더욱 더 버텼다. 결국 시민사회와 군소야당이 연대해 나섰고 언론도 한 목소리로 가세해 도왔다. 그렇게 10여년을 싸운 끝에 드디어 1994년 선거제도 개혁에 성공했다. 그리고 1996년 연동형 비례대표제 방식으로 사상 처음 총선을 치렀다. 120석 가운데 여당인 국민당은 과반수(61석)에서 크게 미달했다. 득표율도 1936년 창당 이래 사상 최저치를 기록했다. 군소 중도·우파정당을 다 합쳐도 53석에 불과했다. 좌파 역시 노동당과 동맹당을 합해도 50석에 그쳤다. 캐스팅보트는 17석을 차지한 퍼스트당이 쥐게 되었다. 국민당 장관 출신 윈스턴 피터스가 1993년 창당한 퍼스트당은 뉴질랜드우선주의와 우파포퓰리즘을 표방한다. 피터스는 창당 때부터 기초연금 축소와 기초연금 부가세 반대운동에 적극 앞장섰으며 총선 주요공약으로 기초연금 부가세 폐지와 강제적 민간연금 도입을 내걸었다. 당연하게도 이 당은 연금수급자, 특히 고소득 연금수급자들로부터 높은 지지를 받았다. 1985년 도입된 기초연금 부가세는 마침내 1998년 4월 폐지됐으나 퍼스트당이 핵심적으로 제안한 강제적 민간연금 도입은 국민투표를 통해 부결됐다. 윈스턴도 1998년 8월 연정에서 이탈했고 국민당이 주도한 우파연합은 이듬해 총선에서 노동당 주도의 좌파연정에게 정권을 내주었다.

1999년 노동당은 동맹당과 연정에 합의한 후, 녹색당과는 각외(閣外) 정책연합을 통해 좌파만으로 66석을 확보했으며 9년 만에 재집권에 성공했다. 총선을 통해 집권한 사상 최초의 여성 총리인 헬렌 클라크는 연정 파트너를 바꾸어가며 3기 연속 재임에 성공한다. 특히 2005년 3기 내각 때는 퍼스트당 윈스턴 피터스에게 요직인 외무장관을 할애하면서 좌·우 연정을 이어가는 등 유연함까지 보여주었다. 2008년 세계금융위기 속에서 수출이 둔화되고 마이너스 성장 등으로 경제위기가 찾아오자 정권은 우파로 넘어갔다. 2008년 존 키 총리를 수반으로 하는 국민당 연정이 성립했으나 이번에는 좌파 녹색당을 각외(閣外) 정책연합으로 참여시키는 유연함을 보였다. 그래서 개인 소득세 최고구간은 39%에서 33%까지 인하하는 대신 부가세를 12.5%에서 15%로 인상하고 최저임금도 시간당 12달러에서 15.75달러까지 올리는 등 좌·우 타협을 적절하게 조화했다.

뉴질랜드 사례에서 보듯 다수 국민의 지지를 받는 정당 또는 정당연합이 정부를 맡아야 함은 당연하다. 그렇기 때문에 소선거구제보다는 연동형 비례대표제, 연동형 비례대표제보다는 완전한 비례대표제가 국민의 의사를 반영하는데 매우 적합하다. 국민이 선출하는 정부는 국민이 원하는 일을 대신하는 대리인(a representative)일뿐이다. 그런데 “국민은 먹고사는 문제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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