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3.1운동이 일어나기 직전인 2월8일 일본 도쿄에서 조선인 유학생들이 독립선언을 했죠. 바로 100년전 오늘입니다.
와세다대학 철학과에 재학중이던 춘원 이광수는 같은 대학에 다니던 최팔용(崔八鏞)을 비롯한 조선인 유학생을 규합해 선언서를 발표하는 거사를 기획했습니다. 독립선언문은 이광수가 와세다대학 앞 소바집 산쵸안(三朝庵, 2018년 문을 닫음) 2층에서 한국어와 영어로 직접 작성했고 8일 아침에 각국 대사관과 일본 국회의원, 조선총독부, 일본의 언론에 발송되었습니다. 최팔용은 이광수의 신변을 걱정해 피신할 것을 권했고 이광수는 상하이로 가게 됩니다.
백관수(白寬洙)가 독립선언문을 낭독했고, 선언문 4개항은 만장일치로 채택됐죠. 행사장에 일본경찰이 들이닥쳐 유학생 60여명이 체포됐습니다. 최팔용과 백관수 등 8명은 기소됐습니다. 유학생들은 2월12일과 28일에 독립선언문 낭독과 거리행진을 이어갔습니다. 이 사건 소식은 국내로 전해져서 3.1운동의 촉진제가 됐죠. 2.8 독립선언서도 국내로 밀반입됐습니다.
# 2.8독립선언을 주도한 조선유학생을 변호한 일본인
2.8독립선언 때 시위를 한 조선유학생들을 변호한 사람은 일본인 인권변호사 후세 다츠지(布施辰治, 1880~1953)였습니다. 그는 최팔용과 백관수, 송계백을 변호했고 내란죄 혐의에 대해 무죄를 주장했습니다.
독립선언을 한 조선인을 변호한 일본인. 후세 다츠지는 어떤 사람일까요. 그는 식민지 광기의 시대에 몇 안 되는 일본의 양심으로 손꼽힙니다. 1923년, 영화 '밀정'의 실제인물로 알려진 김시현과 황옥을 변호한 바 있고 1924년 도쿄 궁정에 폭탄을 투척한 의열단원 김지섭의 변호를 맡기도 했죠. 1923년 관동대지진 때 조선인 학살사건에 분노해 일본정부에 항의했고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에 이와 관련한 사죄문서를 보냈던 사람입니다.
# 해방 뒤 조선건국 헌법초안 작성하기도
또 독립운동가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를 변호했던 분이기도 합니다. 천황에 폭탄투척 모의 혐의로 법정에 선 두 사람의 무죄를 주장했으며, 옥중결혼을 주선해주기도 했습니다. 후미코가 죽은 뒤 그녀의 유골을 수습해 박열의 고향인 경북 문경으로 보내기도 했습니다. 영화 '박열'에도 잠깐 등장합니다. 그는 이후에 '운명의 승리자 박열'이란 책을 집필하기도 했습니다. 해방 이후에는 재일 한국인 사건과 노동운동의 변호를 도맡았습니다. 1946년 조선 건국 헌법초안을 작성하기도 했습니다.
# 자기와 남을 구별하지 않고 사랑하라는 묵자 신봉자
일본인이었던 그는 어떻게 당시 식민지였던 조선에 대해 이렇게 공정한 인권적 시각을 지닐 수 있었을까요.
그는 톨스토이를 즐겨읽던 문학청년이었다고 합니다. 묵자사상을 일찍부터 익혀 겸애(兼愛)사상에 심취했습니다. 묵자의 겸애는, 모든 인간을 사랑하는 것은 하늘의 뜻에서 나온 것이며 도덕성의 당위이자 인간에게 주어진 의무라는 교설을 기본으로 합니다. 자기와 남을 구별하지 않고 모든 사람을 자신을 대할 때처럼 겸애한다면 세상에 다툼은 없어져 천하에 큰 이로움이 된다고 주장합니다.
메이지 대학 법학과를 졸업한 뒤 검사를 거쳐 변호사가 됩니다. 경술국치 이듬해인 1911년 조선 의병운동을 다룬 '조선독립운동에 경의를 표함'이란 논문을 발표한 뒤 일본경찰의 조사를받기도 합니다. 논문은 일본의 한반도 병합이 침략임을 규정하고 있습니다. 이 일을 계기로 그는 소신의 삶으로 꿋꿋하게 나아갔습니다.
# 대한민국 독립유공자가 된 양심적 일본인
우리나라 독립유공자 중에 일본인 출신이 2명 있는데, 한명은 박열과 함께 천황 살해 모의로 옥중 타계한 가네코 후미코이며 다른 한명은 바로 후세 다쓰지입니다.
고향 미야기현 아시노마키시의 후세 다츠지의 비석에는 "살아야 한다면 민중과 함께, 죽어야 한다면 민중을 위해"라는 그의 말이 새겨져 있습니다. 당시 우리나라와 관련해서는 "조선문제는 결코 조선에만 한정된 문제가 아니며 동양의 발칸문제와도 같다. 조선은 세계평화와 혼란을 좌우하는 열쇠이며 전세계 전인류의 문제다"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2.8독립 운동을 벌인 조선인 유학생을 변호한 일은, 그가 마침내 작심하고 식민지의 독립을 지지하며 그 뜻을 마침내 실천하기 시작한 '행동하는 양심'의 출발이었습니다.
이상국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