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등불’
세상은 컴컴한 숲이다. 나는 나의 등불을 손에 들고, 내가 가고자하는 목적지를 갈 것이다. 나는 등불을 어떻게 준비할 것인가? 나는 그 등불을 인터넷을 통해 주문할 것인가? 그 등불은 내가 손에 쥐고 내 발걸음이 인도하는 대로 따라가는 물건이 아니다. 그 등불은 내가 어디로 가야 하는지 그 목적지를 알려줄 뿐만 아니라, 지금 내가 내디뎌야 할 발의 위치를 섬세하고 강력하게 가르쳐줘, 발걸음을 움직이게 하는 원칙이다. 내 머리나 발이 나를 인도하는 것이 아니라 내 등불이 나를 인도한다. 그 등불은 각자에게 유일하고 독창적이다. 그러기 때문에 강력하고 감동적이다. 그 등불은 주관적이면서도 보편적이다. 다른 사람이 지닌 등불과는 전혀 다른 모양이지만 각자가 궁극적으로 도착해야 할 숭고한 목표를 지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혜로운 침묵’
에머슨은 인간의 위대함은 자신의 내면에 존재하는 ‘오버소울(Oversoul)'의 발견에서 시작한다고 말한다. 이 단어가 한국어로 ‘대령(大靈)'으로 번역되나 필자는 오버소울이란 영어 단어를 그냥 사용할 것이다. 인간의 경험보다 더 실제적인 인간의 최선(最善)을 작동시키는 엔진이다. 그는 이 오버소울을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우리가 삶을 영위하는 위대한 자연은 모든 생물과 무생물을 포함하는 오버소울입니다. 우리는 연속, 분할, 부분 그리고 지극히 분자 안에서 삽니다. 그러나 인간 안에는 우주 전체를 껴안은 영혼이 있습니다. 그것은 지혜로운 침묵, 보편적인 아름다움입니다. 모든 부분들과 분자들은 영원한 한 존재와 연결돼있습니다. 우리는 이 심오한 힘 안에서 존재하고 그 아름다움을 경험합니다. 오버소울은 스스로 만족하고 매 순간 완벽합니다. 오버소울 안에서는 보는 행위와 보이는 행위, 보는 사람과 보이는 대상, 주어와 목적어가 하나입니다. 우리는 세상을 별개로 봅니다. 태양, 달, 동물 그리고 나무를 별도로 봅니다. 그러나 이 빛나는 부분들이 모인 전체가 바로 오버소울입니다.”
오버소울은 내면의 빛이다. 인간은 그 빛을 투과시켜 사물과 사람의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도구다. 인간은 그 내면에 지혜와 선이 거주하는 신전의 외관이다. 내면의 빛이 한 인간을 통해 숨을 쉬면, 천재성이고, 그의 의지를 통해 숨을 쉬면, 덕이 되고, 그의 관심을 통해 흘러나가면, 사랑이 된다. 에머슨은 이 내면의 빛은 인간의 언어로 표현할 수도 색으로 표현할 수도 없는 미세한 것이라고 말한다. 이 빛은 정의할 수도 측정할 수도 없지만 위대한 사람의 삶의 원칙이며 신의 특성이다.
내면의 빛
요가수련자는 자신의 내면의 빛을 발견해 밝힘으로 삼매경에 진입하기 위한 마음의 평정을 이룰 수 있다. 이 내면의 빛은 노자에게는 ‘도(道), 플라톤에게는 ‘선과 아름다움’, 아리스토텔레스에게는 ‘존재’, 플로티노스에게는 ‘무한’, 예수에게는 ‘내면의 천국’이며, 유대교에서는 ‘에인 소프(ein sof)'라는 ‘무한’이다. 내면의 빛이 각 문화권에서 다양한 용어로 표현됐지만, 그것은 인간의 내면에 존재해 경험되고 깨어나길 바라는 보편적인 의식이다. 인도의 초월명상법을 개발한 마하리시 마헤쉬 요기는 인간이 자연스럽게 자신의 내면에 들어가 안주하면 에머슨이 말한 ‘지혜로운 침묵’을 경험할 수 있다고 말한다.
파탄잘리는 '요가수트라' I.36에서 요가수련자가 삼매경에 들어가기 위해 잡념을 제거하는 방법으로 다음과 같이 ‘내면의 빛’ 수련을 소개한다. “비쇼카 바 조티시마티(viśokā vā jyotiṣmatī)" 이 문장을 번역하면 이렇다. “혹은 (요가수련자는) 슬픔으로부터 자유로운 내념의 빛을 몰입해 (삼매경진입을 방해하는 잡념들을 제거할 수 있다.)” 유한한 인간이 생로병사의 경험을 통해 느끼는 상실감이 슬픔이다. ‘슬픔’을 의미하는 산스크리트 단어 ‘소카(śokā)'는 ‘(불이) 타오르다’라는 의미의 동사 ‘숙(śuk)'의 명사형이다. 슬픔이란 상실을 경험한 인간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불길과 같다. 이 슬픔도 가만히 들여다보면, 슬픔을 유발한 대상에 대한 자신의 집착(파리그라하·parigraha)에서 출발한다.
요가 수련자는 내외부 자극에 의한 슬픔으로부터 자유로운 상태를 유지해야,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다. 파탄잘리는 ‘슬픔’으로부터 ‘자유로운(vi)' 마음의 상태가 있다. 파탄잘리는 요가수트라 I.35에서 그런 마음을 ‘스티티 니 반디니(sthiti-ni-bandhinī), ‘모든 잡념을 제거하여 하나가 된 흔들리지 않는 마음’이라고 말했다. ‘슬픔으로부터 자유로운’ 마음이 바로 그런 마음이다.
‘내면의 빛’이라고 번역된 ‘조티시마티(jyotiṣmatī)'는 ‘빛나다’라는 의미를 지닌 산스크리트어 동사 ‘주트’(yut)'에 파생한 명사 ‘조티시(jyotiṣ)'와 ‘-을 지니고 있는’라는 의미의 접두사 ‘만트(manti)'의 합성어다. 인간의 마음속에는 외부의 자극, 특히 슬픔이란 마음의 불길을 잠재울 더 큰 불길이 존재한다. 그것이 바로 ‘내면의 빛’이다. ‘내면의 빛’은 외부의 자극에 의해 조절되는 인위적인 슬픔을 극복하나. 유일한 선의 모습은 바로 이 내면의 빛이다. 우리는 이 빛을 통해 만물들을 자신의 왜곡된 시선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다.
요가수련자는 자신의 내면에 존재하는 ‘나의 나됨’인 ‘아스미타(asmitā)'를 깨닫는다. 나의 나됨은 외부의 자극에 대한 반응이 아니라, 외부의 자극에 대한 자신의 정신적이며 영적인 반응을 응시해, 자신에게 온전히 몰입한 정중동의 상태다. 높은 수준의 의식은 외부에 반응하는 자신의 변화를 감지하고, 그 변화를 자신이 궁극적으로 가고자하는 목적지와 일치시키려는 생각훈련이다.
요가수련자는 외부의 가르침, 특히 학교, 종교, 혹은 책이 설교하는 진리보다, 자신의 힘으로 발견한 진리가 더 거룩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교육이란 이런 진리를 깨닫도록 학생들을 자극하는 과정이다. 우리의 시선은 외부에 고정돼 있어 자신도 모르게 그것을 부러워하는 마음이 생긴다. 부러움은 자신의 빛을 찾지 않는 게으름이며, 그 빛을 발견하지 못하는 어리석음이고, 그 빛을 발화시키지 못하는 비겁이다. 외부의 찬란함에 빛에 현혹돼 그 빛을 따라가는 것은 불나방이 자신을 불태워 죽이는 불에 날아가는 치명적인 실수다. 현대인의 삶의 문법인 흉내는 자신에게 집중하지 못하는 권태이며, 자신보다 남을 더 사랑하는 마음의 산란이고, 인생이란 마라톤을 달리면서도 그 결승점을 확인하지 않는 바보짓이다.
내면의 빛을 찾는 시작은 이것이다. 요가수련자는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주관적으로 살펴보고, 그것을 자신이 사랑할 수밖에 없는 운명으로 여겨야한다. 모든 나무나 식물은 자신에게 주어진 조그만 땅에서 자양분을 흡수한다. 자신에게 주어진 환경이 자신의 위대함을 발견할 수 있는 유일한 토대다.
비틀스의 노래 'The Inner Light'
비틀스는 1967년 조지 해리슨이 작곡한 '더 이너 라이트(The Inner Light)'란 노래를 발표한다. 해리슨은 노자의 '도덕경' 47장에 근거해 영어로 번역하여 작사했다. 노자의 '도덕경' 47장 내용은 이렇다. “문을 나서지 않고도 세상을 알고, 창문을 통하지 않고도 천하를 본다. 나간 것이 점점 멀어질수록, 아는 것이 점점 줄어든다. 이로써 성인은 행하지 않고도 알고, 보지 않고도 명철해지며, 하지 않고도 이룬다 (不出戶, 知天下, 不窺牖, 見天道. 其出彌遠, 其知彌少.是以 聖人, 不行而知, 不見而名, 不爲而成)." 노자는 성인의 도가 바로 자연의 도와 일치하는 심물합일을 깨달았다. 해리슨은 The Inner Light에서 다음과 같이 노래한다. “집밖으로 나가지 않고, 당신은 온 세상을 안다. 창문 밖으로 쳐다보지 않고, 당신은 하늘의 색을 안다. 당신 경험을 더 할수록, 당신은 더 모른다. 현자는 앎 없이 돌아다니며, 쳐다보지 않고 보며, 행동하지 않고 성취한다(Without taking a step outdoors. You know the whole world; Without taking a peep out the window. You know the colour of the sky. The more you experience, The less you know. The sage wanders without knowing, Sees without looking, Accomplishes without acting)."
나의 최선이 마음속 깊은 곳에 ‘내면의 빛’으로 존재하는데, 나는 무엇을 찾아 헤매고 있는가? 나는 슬픔이 더해지는 외부를 향하고 있는가? 아니면 그 슬픔을 기쁨으로 바꿀 내부를 향해 온전히 정진하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