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기의즐거움]'초격차'권오현은 문정부의 기업정책에 이렇게 말했다

2018-10-18 1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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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기업의 가장 위대한 성공 '삼성 반도체 신화'를 일군 CEO가 밝힌 경영비밀

지난 9월 출간되자 마자, 장안의 화제가 된 책 '초격차'(쌤앤파커스, 권오현 저)는, 21세기 삼성의 반도체 신화의 비밀을 당사자가 스스로 공개한 인문학적 경영론이다. 리더, 조직, 전략, 인재 네 분야로 나눠서 전개한 그의 생각은, 336쪽의 두툼한 책이 아쉬울만큼 단숨에 읽혔다. 생각을 정리하기 좋도록, 잘 나눠서 말하고 있지만, 일관성 있게 흐르는 경영철학 혹은 조직관 같은 것이, 각 챕터마다 녹아들어 있어서 다 읽고나면 마치 한 사람의 진면목을 접한 듯 감동이 있다.
 

[권오현 전삼성전자 대표이사 부회장]



리더십이나 조직론과 관련해 이 책을 통해 얻어갈 것은 풍성해 보인다. 처음에 '초격차'라는 제목만 들었을 때, 삼성이 뭔가 좀 크게 이뤘다고 다른 이는 넘보지도 못할 무엇에 대한 자랑을 잔뜩 하겠구나 하는 선입견을 지녔다면, 나와 비슷한 사람일 것이다. 이 책은 '초격차'란 말에 대한 그런 오해를 세심하게 풀어주는데도 한몫을 한다.
# 초격차는 단순무식한 일등전략이 아니다

우선 그것부터 정리해놓자. 초격차는 일등이 열심히 해서 이등과 격차를 확 벌려놓자는 그런 단순한 체력단련이 아니다. 이등과 간발의 차이인 일등은 다양한 리스크에 취약하고 그것에 흔들리는 정도가 너무 심하다. 그래서 확실히 일등을 할 기술을 결정해, 선택과 집중으로 후발업체가 따라올 엄두도 못낼 만큼 기술적 격차를 벌여놓자는 생각에서 출발한 이 아이디어는, 저 초격차를 이루기 위해선, 기업의 문화와 역량 전반의 격(格)이 혁신되지 않으면 안된다는 기업내재화 전략으로 확장된다. 이런 논점을 좀 더 이해하기 위해선 책을 읽으며 그 공기를 흡입하는 것이 더 좋을 것이다. 다만 그냥 죽어라고 뛰어 한 바퀴 더 앞선 일등하기 정도의 단순무식한 개념은 아니라는 것은 이해할 필요가 있다.

사서삼경의 하나인 '논어'를 읽다보면, 뒷부분에서 공자가 뭇사람들에게 창피를 당하는 듯한 장면이 여과 없이 등장한다. 이런 '셀프디스'가 몇 천년을 견디면서 삭제되지 않고 전해진다는 점이 놀랍게 여겨지기도 했다. 그런데 권오현의 책에도 그런 대목이 여러 군데 등장한다. 2017년 인텔을 제치고 삼성을 세계 반도체 1위기업으로 올려놓은 탁월한 경영자, 서울대, 카이스트, 스탠퍼드대학을 나온 그는, 책의 말미에서 이런 얘기를 한다.
 

[2018년 권오현이 펴낸 조직경영전략서 '초격차'(쌤앤파커스)]



# 나는 중학교와 고등학교 입시에서 모두 낙방했다

"많은 사람들이 제가 당시 최고 명문중고등학교를 졸업한 줄 압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1960년대에는 중학교, 고등학교 모두 입학시험이 있던 시절이었습니다. 저는 명문 중학교, 명문 고등학교의 입학시험에서 떨어졌습니다...그때 저는 '내 실력이 월등한 게 아니구나, 내가 원한다고 다 되는 것이 아니구나'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저 자신의 한계를 발견한 것이지요. 그래서 더욱 겸손해졌던 것 같습니다. 실패에 대한 내성도 그때 생겼던 것 같습니다. 만약에 제가 그때 시험에 다 붙어서 명문 중고등학교를 다녔으면 기고만장했을 것이고, 추측건대 지금과는 다른 삶을 살게 되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중학교와 고등학교 입학시험에 떨어졌을 때는 정말 세상이 끝난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돌이켜보니, 결코 세상이 끝난 게 아니었습니다."

또 이런 고백도 있다. 학교 후배가 그의 상사로 발령이 났다. 그에게 업무 보고를 해야하는 처지에 놓이게 된다. 게다가 그때가 삼성반도체의 시스템LSI 부서에 근무할 때였는데 그 분야가 아직 꽃을 피우지 못한 때라 실적이 좋지 않았다. 그는 생각했다. 아, 회사가 나를 내보내려고 하는구나. 그래서 사직을 하려고 생각했고, 그것을 후배들에게 말한다. 그때 후배들의 말.

# 나는, 바로 위에 상사로 온 후배 밑에서 8년을 일했다

"아니, 그런 일이 닥치더라도 개인이 아니라 회사를 위해서 함께 일하자고 말씀하시더니 정작 본인에게 그런 일이 닥치니까 그만두시겠다는 겁니까? 그럼 다른 사람들과 다른 게 뭡니까?"

그는 그동안 자신이 해왔던 말을 생각했다. "회사라는 조직은 혼자 일하는 곳이 아니다. 먼저 회사가 잘 되고, 그 다음에 부서가 잘 되고, 그리고 마지막으로 본인이 잘 되어야 한다. 개인적인 생각이 있더라도 조직이나 회사가 결정하면 따라야 한다." 이렇게 했던 말이 자승자박이 된 것이다. 그는 문득 이렇게 대답했다.

"그래. 당신들 말이 맞다. 내가 늘 그렇게 말해왔는데, 내가 그걸 어기면, 나는 정말 별 볼 일 없는 사람이 되는 거다. 솔직히 기분 나쁘다. 하지만 우리 함께 실력을 키우자."

그는 이후 8년간 그 후배에게 업무보고를 했다. 그러나 견뎌냈다.

# 난 모바일시대를 예견하고 부품 만들었는데, 잡스는 아예 폰을 만들었구나

스티브 잡스와 대면한 에피소드도 생생하다.

2007년 스티브 잡스가 아이폰을 처음 만들어 신제품소개를 하는 자리, 맨 앞좌석에 당시 삼성반도체 사장 권오현이 앉아있었다.

2004년 권오현이 반도체 사장으로 앉은 뒤 사업부를 대폭 정리해서 5개만 남겼는데, 그때 주위의 반대를 무릅쓰고 모바일 CPU 부문을 존속시켰다. 향후 모바일이 대세가 될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때만해도 노키아가 휴대폰의 강자였는데, 권오현은 자신의 CPU제품을 들고 노키아에 팔러 갔으나, 그쪽에선 거들떠도 보지 않았다. 2006년까지 그런 상황이 계속 되자, 삼성 내부에서 권오현의 판단이 잘못 됐다는 여론이 일기 시작한다.

그런 상황에서 그는 애플의 전화를 받는다. 자신이 만들고 있는 모바일CPU에 관심이 있으니 만나자는 것이다. 살았구나 싶었지만, 의아한 점도 있었다. 애플은 당시 컴퓨터 회사였다. 컴퓨터 회사에서 왜 모바일CPU를 찾는지 알 수 없었다.

잡스의 저 청바지 프리젠테이션을 들으면서, 애플의 엄청난 혁신에 대해 알게 됐다. 엄청난 제품 구매자가 생겨서 좋았다고도 할 수 있었지만, 미래를 예측하고 혁신을 준비하여 당당하고 아름답게 발표하는 잡스를 보고는 속이 끓을 수 밖에 없었다.

권오현은 이 회사의 미래예측을 따라가지 못한 것에 대해, 깊이 반성했다고 한다. 그때의 아픔은 그에게 기업경영자로서의 획기적인 분발을 하게 하는 계기였다.

# 정부가 친기업 아니라고, 근로시간을 조정했다고 기업이 투덜거릴 일 아니다

이런 얘기들 말고도, 오래 한 페이지에 머물러 있었던 곳은 많았다. 그 중에서도 인상적인 것은 여기였다.

"새 정부에 친기업 정서가 없다고 비판만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대응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새로 들어선 정부가 경제운용 방식을 바꾸었다면 그것을 피할 수 없는 경영환경의 변화로 빨리 받아들이고 이에 대한 대비책을 마련해야 합니다. 그동안 당연한 것으로 여겨왔던 경영방식을 재검토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이렇게 얘기한 뒤, 더 흥미롭게 얘기를 진전시킨다.

"새 정부가 근로자들의 근무시간을 조정하겠다는 정책을 펼친다고 칩시다. 그렇다면 그것은 기업에게 또다른 기회를 주는 것입니다. 절대적인 근무시간을 줄이기 위해서 그동안 비효율적으로 운영되었던 노동생산성에 대한 재평가를 실시하고 더 효과적으로 근로시간을 활용하는 방안을 모색하면 되는 것입니다."

정부 관료가 아닌, 기업가가 이 문제에 대해 진지하게 이렇게 얘기하는 것은 처음 보는 것처럼 낯설다. 그는 워크스마트(똑똑하게 일하기) 운동을 워크스마터(더 똑똑하게 일하기)로 전환하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고 말한다. 노동정책 변화에 대한 우려와 불평을 말하는 목소리 속에서 그는, 이것을 노동효율성을 키우고 저녁이 있는 삶으로 나아가는 출발점으로 삼아야 한다고 말한다. 이건 '역경'이 아니라, 계기라는 주장이다. 이 경영자가, 어떻게 한국 최대의 기업을 움직이고 진화하도록 해왔는지를 느끼게 하는, 놀라운 유연함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이런 의견이, 정부의 정책에 대한 비판이 지니고 있는 타당성과 유효성까지 무시하는 말은 아니리라. 그런 비판을 내는 쪽도 분명히 필요하지만, 정권 교체에 따른 기업정책 변화를 이렇게 '디폴트'값으로 삼아 기업을 새롭게 하는 기회로 삼자는 생각은, 이 책을 통틀어 그의 탁월한 경영의 내면을 드러내는 잊지못할 대목이 아닐까 한다. 이 열린 태도가 삼성신화를 만든 힘이었으리라. 이런 책을 맛있게 읽는 것도 오랜만이다. 


                           이상국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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