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행일치
요가 수련의 궁극적인 목적은 무엇인가? 파탄잘리가 '요가수트라' I.2에서 언급한 것처럼 “마음속에서 소용돌이처럼 매 순간 불현 듯 일어나는 잡념을 잠잠하게 만드는 수련인가? 수련자는 수련하지 않는 사람과 무엇이 다른가? 몸을 자유자재로 움직이고 구부리며, 남들로 인정하는 건강하고 아름다운 신체를 지니는 것인가? 인간은 외딴 섬에서 홀로 지니는 동물이 아니라 적게는 가족, 학교친구, 직장동료와 공동생활을 영위할 뿐 아니라 지하철, 버스, 마켓, 백화점과 같은 장소에서 낯선 사람들과 끊임없이 마주치면서 산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은 낯선 사람들과 ‘도시’라는 인위적인 공간을 만들어 자신의 행복과 안전을 담보하는 ‘도시 안에서 사는 동물’이라고 정의했다. 요가를 오랫동안 수련한 자는 자신에게 정돈돼있고 예의가 바를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친절하다.
요가수련자의 수준은 그(녀)가 다른 사람에 대한 태도로 가름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이 오랫동안 요가 수련했다고 주장하나, 그의 말이나 행동이 자신의 육체를 통해 표현되는 섬세하고 아름다운 요가동작의 수준에 미치지 못한다면, 그는 요가 수련자가 아니다. 그는 그저 남들에게 보이는 몸을 치장하는 분장사나 몸을 구부리는 곡예사에 불과하다. 수련하는 자는 자신의 몸가짐의 정교함과 섬세함을 자신의 말과 행동으로 표현한다. 수련자는 자신의 숭고한 생각을 몸으로 표현하기를 훈련해 자신의 습관으로 자신의 삶의 일부로 만들려고 노력한다.
요가 수련자가 오랜 수련을 통해 자신의 마음 속 깊은 곳에 존재하는 ‘자기 자신’이라는 보물을 발견할 것이다. 그 보물이란 자신을 빛나게 하는 유아독존 식의 카리스마가 아니다. 그것은 그가 자신의 주변의 사람들과 사물들에 대하는 태도로 발현된다. 파탄잘리는 요가수트라 I.33에서 요가수련자의 특징에 대해 설명한다. 최고의 요가스승은 자신의 몸을 한없이 비트는 ‘육체의 곡예사’가 아니라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정도로 마음을 비틀어 자신과 주위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영혼의 곡예사’다.
요가수트라 I.33
파탄잘리는 요가수련을 가로막는 훼방꾼들을 극복하는 다양한 방법을 제시하면서, 요가 수련자가 지녀야할 자신의 일상생활에서 수련해야 할 마음가짐을 열거한다. 온전한 요가수련을 완수하기 위해서는 나 혼자 스스로 스승의 지도아래 육체를 훈련하는 것뿐만 아니라, 내가 일상생활에서 미치는 다양한 상황에서 내 마음을 다스려야 한다. 수련하지 않는 사람들은 시시각각 일어나는 크고 작은 일에 대해 자신의 기분에 따라 되는 대로 반응해 혼돈에 빠지게 된다. 파탄잘리에게 요가수련장은 자신의 육체를 수련하는 장소일 뿐만 아니라 자신이 생활하는 일상이라고 말한다. 파탄잘리는 요가수련자의 내공은 일상생활에서 다음과 같이 발휘한다고 말한다. “마이트리 카루나 무디토-펙사남(무디타 우펙사남) 수카-투카 푼야-아푼여 바샤야남 바바나타흐 치타 프라사다남(maitrī karuṇā mudito-pekṣāṇāṁ sukha duḥkha puṇya apuṇya viṣayāṇāṁ bhāvanātaḥ citta prasādanam)" 요가수트라 I.33에 나오는 이 문장을 직역하면 다음과 같다. “요가 수련자의 마음은 자(慈), 비(悲), 희(喜), 사(捨)의 실천을 통해 기쁘거나 슬프거나, 행복하거나 불행하거나 상관없이, (언제나) 명료하다.”
요가수련자 자기 자신과 조화롭게 명료한 관계를 맺을 뿐만 아니라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과도 조화롭게 명료한 관계를 유지한다. 일상은 내가 의도하지도 상상하지도 않는 모습으로 항상 나를 엄습한다. 그런 다양한 상황들을 파탄잘리는 ‘기쁘고 슬프고, 행복하고 불행한’ 다양한 상황들이라고 표현한다. 이 표현은 정 반대의 의미를 지닌 단어를 병렬해 전체를 의미하는 수사학적 표현으로 ‘전부; 전체’를 의미한다. 오늘 나에게는 예상치 못한 기쁜 소식이 전달될 수도 있고 혹은 슬픈 소식에 올수도 있다. 또는 어떤 사람을 통해 내가 행복을 느낄 수도 있고 혹은 불행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사실 어떤 사건이 기쁘고, 슬프고, 혹은 행복하거나 불행한 것은 없다. 다만 그 사건에 대한 나의 반응인 감정일 뿐이다.
사무량심
파탄잘리는 요가수련은 자신의 몸과 마음에 대한 훈련일 뿐만 아니라, 그(녀)가 매일 매일 마주치는 수많은 일상 가운데서 네 가지 심성을 훈련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네 가짐 마음은 요가수련의 당연하고 자연스런 표현이다. 이 네 가지 심성을 산스크리어로 ‘브라흐마비하라스(brahmavihāras)', 즉 ‘신이 거주하는 네 장소’라고 말했다. 요가수련과 명상을 통해 네가지 사회적인 감정이 자신의 몸, 말, 그리고 행위를 통해 사방으로 퍼져나간다. 요가수련자의 마음은 이러한 감정들의 거대하고 무한한 저수지가 된다. 이 무한성이 ‘브라흐마(brahma)'란 단어를 통해 표현됐다. 고대 인도에서 브라흐마 신들은 천상에 거주하면서 삼라만상을 다스린다. 브라흐마의 무한성이 한자로 번역되면서 ‘셀 수 없는’이란 의미를 지닌 ‘무량(無量)이 됐다. 불교에서는 극락정토의 아미타불을 모시는 불전을 ‘무량수전’이라고 부른다. 영주에 있는 고려시대 불전이름이 ‘무량수전(無量壽殿)'이다. 요가수련자의 마음은 브라흐마와 같아, 자신의 숭고한 마음인 다음 네 가지가 자연스럽게 일상에서 드러난다.
첫 번째 마음은 다른 사람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여 친절하고 더 나아가 사랑하는 마음인 산스크리트어 단어 ‘마이트리(maitrī)'다. 후대 등장한 팔리 산스크리어로눈 음운변화를 일으켜 ‘메타(metta)'다. ‘마이트리’가 중국으로 건너와 한자 ‘자(慈)'로 번역됐다. ‘마이트리’란 상대방과 나의 경계가 허물어져 가물가물(玄)한 상태다. 산스트리트어 ‘마이트리’는 고대 인도-이란의 ‘미쓰라(Mithra)'라는 신 개념에서 출발하였다. 이란의 가장 오래된 경전인 아베스타 문헌에서는 미쓰라로, 인도의 가장 오래된 경전인 베다에서는 ‘미트라(mitra)'로 표현됐다. ‘미쓰라’는 ‘서로 다른 요소들을 하나로 묶다’라는 의미를 지닌 동사 ‘미(mi-)'와 앞에 위한 동사를 사역형으로 전환하는 어미 ‘쓰라(-thra)'의 합성어다. ‘미쓰라’의 의미는 ‘이질적일 것을 하나로 묶어 운명공동체로 만들다’란 의미다. 아베스타어에서는 ‘미쓰라’가 ‘체결, 맹세, 계약’이란 의미다. ‘자'는 소극적으로 내가 타인을 내 자신처럼 친절하게 대하고 사랑할 뿐만 아니라, 적극적으로 타인이 사랑하는 것을 즐길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는 노력이다.
두 번째 마음은 타인의 고통을 나의 고통으로 느낄 수 있는 마음인 ‘카루나(karuṇā)'다. ‘카루나’는 다른 사람들이 당한 상처나 고통을 함께 슬퍼할 뿐만 아니라, 그 고통을 제거하려는 마음과 행동이다. 우리가 미디어를 통해 비참한 상황에 처한 낯선 자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그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생겨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는 것은 자연스런 현상이다. ‘카루나’는 그런 감정 이상이다. 다른 사람의 고통을 나의 고통으로 동일하게 느껴, 그 상대방을 그 고통으로부터 탈출시키고 싶은 마음과 행동이다. ‘카루나’는 한자로 ‘비(悲)'로 번역됐다. 이 한자에는 흔히 ‘아닐 비’로 알려진 한자 非가 있다. 한자 非는 원래 새가 날기 위해 좌우로 벌 날개를 형상화하였다. ‘카루나’는 새가 자신이 가고 싶은 목적지로 날기 위해서는 좌우날개를 모두 사용해야한다. 여기서 한쪽 날개는 고통을 당한 다름 사람을 의미한다. 나는 타인의 고통과 아픔을 치료하지 않고는 조금이라도 비상할 수 없다. ‘카루나’는 영어로 ‘컴패션(compassion)'으로 번역된다. ‘컴패션’이란 다른 사람의 고통(passion)을 내가 함께(com) 지고가려는 숭고한 마음이다.
세 번째 마음은 ‘무디타(mudita)'로 한자로는 ‘희(喜)'로 번역됐다. ‘무티타’는 상대방의 행복을 나의 행복처럼 느끼는 마음이다. 모든 인간에겐 ‘무디타’를 어려서부터 가르친 스승이 있다. 바로 ‘부모’다. 부모는 자식의 행복을 자식보다 더 기원하고 더 기뻐한다. 인격은 ‘무디타’를 통해 확인되고 신장된다. 어떤 사람이 자신의 가까운 친구, 동료, 혹은 자신이 모르는 어떤 사람의 성공을 시기나 질투하지 않고, 진심으로 축하할 수 있다면, ‘무디타’란 숭고한 감정을 소유한 자다. 네 번째 마음은 ‘우펙샤(upekṣā)'다. 우펙사는 어떤 외부의 자극에도 평점심을 잃지 않고 수련하는 마음이다. 우펙샤는 자신의 주위에 일어난 유혹에 자신이 흔들리지 않고 자신이 가야할 목적지를 향해 천천히 정진하는 의연함과 자신감이다. 요가 수련자는 자신의 목적지를 알고 있다. 그는 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뒤돌아보지 않고 목적지를 향해 나갈 뿐이다. 그는 그의 수련을 방해하던 욕망을 보란 듯이 버리고 자신의 온 정성을 수련에 집중한다. 우펙샤는 한자로 ‘버릴 사’ 혹은 ‘베풀 사’捨로 번역되었다. 요가수련자는 일상에서 자, 비, 희, 사를 실천해 자신이 가야할 길을 선명하게 아는 ‘명료한 마음’을 획득한다.
요가수련자의 수준은 그(녀)가 다른 사람에 대한 태도로 가름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이 오랫동안 요가 수련했다고 주장하나, 그의 말이나 행동이 자신의 육체를 통해 표현되는 섬세하고 아름다운 요가동작의 수준에 미치지 못한다면, 그는 요가 수련자가 아니다. 그는 그저 남들에게 보이는 몸을 치장하는 분장사나 몸을 구부리는 곡예사에 불과하다. 수련하는 자는 자신의 몸가짐의 정교함과 섬세함을 자신의 말과 행동으로 표현한다. 수련자는 자신의 숭고한 생각을 몸으로 표현하기를 훈련해 자신의 습관으로 자신의 삶의 일부로 만들려고 노력한다.
요가 수련자가 오랜 수련을 통해 자신의 마음 속 깊은 곳에 존재하는 ‘자기 자신’이라는 보물을 발견할 것이다. 그 보물이란 자신을 빛나게 하는 유아독존 식의 카리스마가 아니다. 그것은 그가 자신의 주변의 사람들과 사물들에 대하는 태도로 발현된다. 파탄잘리는 요가수트라 I.33에서 요가수련자의 특징에 대해 설명한다. 최고의 요가스승은 자신의 몸을 한없이 비트는 ‘육체의 곡예사’가 아니라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정도로 마음을 비틀어 자신과 주위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영혼의 곡예사’다.
요가수트라 I.33
파탄잘리는 요가수련을 가로막는 훼방꾼들을 극복하는 다양한 방법을 제시하면서, 요가 수련자가 지녀야할 자신의 일상생활에서 수련해야 할 마음가짐을 열거한다. 온전한 요가수련을 완수하기 위해서는 나 혼자 스스로 스승의 지도아래 육체를 훈련하는 것뿐만 아니라, 내가 일상생활에서 미치는 다양한 상황에서 내 마음을 다스려야 한다. 수련하지 않는 사람들은 시시각각 일어나는 크고 작은 일에 대해 자신의 기분에 따라 되는 대로 반응해 혼돈에 빠지게 된다. 파탄잘리에게 요가수련장은 자신의 육체를 수련하는 장소일 뿐만 아니라 자신이 생활하는 일상이라고 말한다. 파탄잘리는 요가수련자의 내공은 일상생활에서 다음과 같이 발휘한다고 말한다. “마이트리 카루나 무디토-펙사남(무디타 우펙사남) 수카-투카 푼야-아푼여 바샤야남 바바나타흐 치타 프라사다남(maitrī karuṇā mudito-pekṣāṇāṁ sukha duḥkha puṇya apuṇya viṣayāṇāṁ bhāvanātaḥ citta prasādanam)" 요가수트라 I.33에 나오는 이 문장을 직역하면 다음과 같다. “요가 수련자의 마음은 자(慈), 비(悲), 희(喜), 사(捨)의 실천을 통해 기쁘거나 슬프거나, 행복하거나 불행하거나 상관없이, (언제나) 명료하다.”
요가수련자 자기 자신과 조화롭게 명료한 관계를 맺을 뿐만 아니라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과도 조화롭게 명료한 관계를 유지한다. 일상은 내가 의도하지도 상상하지도 않는 모습으로 항상 나를 엄습한다. 그런 다양한 상황들을 파탄잘리는 ‘기쁘고 슬프고, 행복하고 불행한’ 다양한 상황들이라고 표현한다. 이 표현은 정 반대의 의미를 지닌 단어를 병렬해 전체를 의미하는 수사학적 표현으로 ‘전부; 전체’를 의미한다. 오늘 나에게는 예상치 못한 기쁜 소식이 전달될 수도 있고 혹은 슬픈 소식에 올수도 있다. 또는 어떤 사람을 통해 내가 행복을 느낄 수도 있고 혹은 불행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사실 어떤 사건이 기쁘고, 슬프고, 혹은 행복하거나 불행한 것은 없다. 다만 그 사건에 대한 나의 반응인 감정일 뿐이다.
파탄잘리는 요가수련은 자신의 몸과 마음에 대한 훈련일 뿐만 아니라, 그(녀)가 매일 매일 마주치는 수많은 일상 가운데서 네 가지 심성을 훈련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네 가짐 마음은 요가수련의 당연하고 자연스런 표현이다. 이 네 가지 심성을 산스크리어로 ‘브라흐마비하라스(brahmavihāras)', 즉 ‘신이 거주하는 네 장소’라고 말했다. 요가수련과 명상을 통해 네가지 사회적인 감정이 자신의 몸, 말, 그리고 행위를 통해 사방으로 퍼져나간다. 요가수련자의 마음은 이러한 감정들의 거대하고 무한한 저수지가 된다. 이 무한성이 ‘브라흐마(brahma)'란 단어를 통해 표현됐다. 고대 인도에서 브라흐마 신들은 천상에 거주하면서 삼라만상을 다스린다. 브라흐마의 무한성이 한자로 번역되면서 ‘셀 수 없는’이란 의미를 지닌 ‘무량(無量)이 됐다. 불교에서는 극락정토의 아미타불을 모시는 불전을 ‘무량수전’이라고 부른다. 영주에 있는 고려시대 불전이름이 ‘무량수전(無量壽殿)'이다. 요가수련자의 마음은 브라흐마와 같아, 자신의 숭고한 마음인 다음 네 가지가 자연스럽게 일상에서 드러난다.
첫 번째 마음은 다른 사람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여 친절하고 더 나아가 사랑하는 마음인 산스크리트어 단어 ‘마이트리(maitrī)'다. 후대 등장한 팔리 산스크리어로눈 음운변화를 일으켜 ‘메타(metta)'다. ‘마이트리’가 중국으로 건너와 한자 ‘자(慈)'로 번역됐다. ‘마이트리’란 상대방과 나의 경계가 허물어져 가물가물(玄)한 상태다. 산스트리트어 ‘마이트리’는 고대 인도-이란의 ‘미쓰라(Mithra)'라는 신 개념에서 출발하였다. 이란의 가장 오래된 경전인 아베스타 문헌에서는 미쓰라로, 인도의 가장 오래된 경전인 베다에서는 ‘미트라(mitra)'로 표현됐다. ‘미쓰라’는 ‘서로 다른 요소들을 하나로 묶다’라는 의미를 지닌 동사 ‘미(mi-)'와 앞에 위한 동사를 사역형으로 전환하는 어미 ‘쓰라(-thra)'의 합성어다. ‘미쓰라’의 의미는 ‘이질적일 것을 하나로 묶어 운명공동체로 만들다’란 의미다. 아베스타어에서는 ‘미쓰라’가 ‘체결, 맹세, 계약’이란 의미다. ‘자'는 소극적으로 내가 타인을 내 자신처럼 친절하게 대하고 사랑할 뿐만 아니라, 적극적으로 타인이 사랑하는 것을 즐길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는 노력이다.
두 번째 마음은 타인의 고통을 나의 고통으로 느낄 수 있는 마음인 ‘카루나(karuṇā)'다. ‘카루나’는 다른 사람들이 당한 상처나 고통을 함께 슬퍼할 뿐만 아니라, 그 고통을 제거하려는 마음과 행동이다. 우리가 미디어를 통해 비참한 상황에 처한 낯선 자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그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생겨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는 것은 자연스런 현상이다. ‘카루나’는 그런 감정 이상이다. 다른 사람의 고통을 나의 고통으로 동일하게 느껴, 그 상대방을 그 고통으로부터 탈출시키고 싶은 마음과 행동이다. ‘카루나’는 한자로 ‘비(悲)'로 번역됐다. 이 한자에는 흔히 ‘아닐 비’로 알려진 한자 非가 있다. 한자 非는 원래 새가 날기 위해 좌우로 벌 날개를 형상화하였다. ‘카루나’는 새가 자신이 가고 싶은 목적지로 날기 위해서는 좌우날개를 모두 사용해야한다. 여기서 한쪽 날개는 고통을 당한 다름 사람을 의미한다. 나는 타인의 고통과 아픔을 치료하지 않고는 조금이라도 비상할 수 없다. ‘카루나’는 영어로 ‘컴패션(compassion)'으로 번역된다. ‘컴패션’이란 다른 사람의 고통(passion)을 내가 함께(com) 지고가려는 숭고한 마음이다.
세 번째 마음은 ‘무디타(mudita)'로 한자로는 ‘희(喜)'로 번역됐다. ‘무티타’는 상대방의 행복을 나의 행복처럼 느끼는 마음이다. 모든 인간에겐 ‘무디타’를 어려서부터 가르친 스승이 있다. 바로 ‘부모’다. 부모는 자식의 행복을 자식보다 더 기원하고 더 기뻐한다. 인격은 ‘무디타’를 통해 확인되고 신장된다. 어떤 사람이 자신의 가까운 친구, 동료, 혹은 자신이 모르는 어떤 사람의 성공을 시기나 질투하지 않고, 진심으로 축하할 수 있다면, ‘무디타’란 숭고한 감정을 소유한 자다. 네 번째 마음은 ‘우펙샤(upekṣā)'다. 우펙사는 어떤 외부의 자극에도 평점심을 잃지 않고 수련하는 마음이다. 우펙샤는 자신의 주위에 일어난 유혹에 자신이 흔들리지 않고 자신이 가야할 목적지를 향해 천천히 정진하는 의연함과 자신감이다. 요가 수련자는 자신의 목적지를 알고 있다. 그는 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뒤돌아보지 않고 목적지를 향해 나갈 뿐이다. 그는 그의 수련을 방해하던 욕망을 보란 듯이 버리고 자신의 온 정성을 수련에 집중한다. 우펙샤는 한자로 ‘버릴 사’ 혹은 ‘베풀 사’捨로 번역되었다. 요가수련자는 일상에서 자, 비, 희, 사를 실천해 자신이 가야할 길을 선명하게 아는 ‘명료한 마음’을 획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