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7년 9월 6일. 36세의 광부 김창선씨가 지하 125m에 갇힌 지 15일 9시간 만에 구조됐다. 아무것도 먹지 못한 채 2주 이상 갱도에 갇혀 있었던 김씨는 19㎏이나 몸무게가 줄어 뼈가 앙상한 채 수염이 더부룩한 모습이었다. 세상에 나온 그는 "밥이 가장 먹고 싶었다"는 소박하면서도 절박한 소감을 밝혔다.
김씨는 그해 8월 22일 충남 청양군 구봉금광에서 일하던 도중 수직갱도가 무너지면서 그대로 매몰됐다. 전형적인 인재(人災)였다. 목재로 듬성듬성하게 마감된 갱도 벽에서 진작에 균열이 발견됐음에도, 광산을 운영하던 업체는 10일 동안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심지어 매몰 이틀째까진 구조 시도조차 없었다.
구출된 김씨는 이름도 되찾았다. 김씨는 애초 양씨로 알려졌다. 김씨는 훗날 한 인터뷰에서 군 입대 당시 서류에 '양창선'으로 이름이 잘못 기재됐던 것이라고 밝혔다. 부대에 정정을 요구했지만 묵살됐고, 호적 정정 절차가 까다로워 전역 후에도 양창선으로 살았던 것이다. 황해도 출신인 김씨에겐 본명을 증언해줄 만한 사람도 없었다.
마침 현장에는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구조 작업을 독려하던 청와대 관계자가 있었다. 김씨가 어렵게 "이름을 되찾고 싶다"는 말을 꺼냈더니, 양창선이란 이름이 단박에 김창선으로 바뀌었다. 군사정권 시대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박 대통령은 구조된 김씨에게 축하를 보냈다. 관계당국과 광산업계의 반성을 촉구하며 "앞으로 모든 광산에서 광부들의 안전을 위한 만반의 대책을 강구하라"는 지시를 내리기도 했다. 그러나 엄포가 무색하게도 김씨 구출 사흘 만에 또 다른 매몰 사고가 일어났다. 강원 삼척시 흥국광산의 갱도가 무너져 광부 6명이 목숨을 잃었다. 한편 김씨는 그 후로도 1년을 광부로 일한 뒤 보일러 기사로 직업을 바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