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8월 23일. 전철환 한국은행 총재가 집무실에 들어섰다. 전 총재의 책상에는 '국제통화기금(IMF) 신용인출잔액의 최종상환'이라는 제목의 서류가 놓여 있었다. 전 총재가 결재란에 서명하자, 미리 대기하고 있던 취재진의 카메라에서 플래시가 터졌다. 3년 9개월에 걸친 IMF 차입금 195억 달러에 대한 상환이 완료되는 순간이었다.
일반적으로 중요한 문서의 결재는 최고급 만년필이 쓰인다. 1997년 IMF로부터 구제금융을 받을 당시 임창열 부총리 겸 재정경제원 장관이 서명에 이용한 만년필 또한 수십만원에 달하는 프랑스제 몽블랑 제품이었다. 그러나 이날 전 총재의 손에 쥐어진 것은 국내 업체가 생산한 만년필이었다.
비서실 발등엔 불이 떨어졌다. 직원들은 한은 인근에 있는 남대문 시장 문구점을 샅샅이 뒤졌지만 국산 만년필을 찾을 수 없었다. 국내 업체 상당수가 IMF를 겪으며 만년필 생산을 중단했기 때문이다.
수소문 끝에 만년필 생산업체 한 곳에 연락이 닿았다. 바로 1956년 설립된 국내 최초의 만년필 제조업체 아피스다. 한은의 특별한 부탁에 이들은 기꺼이 만년필 한 자루를 준비했다. 마침 업체 이름 또한 이 자리에 딱 들어맞았다. 아피스(apis)는 꿀벌의 학명이다.
비단 만년필 일화뿐 아니라 전 총재는 평소에도 소탈한 성품으로 주변의 존경을 받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사적인 용무 때는 손수 자가용 프라이드를 운전한 것 또한 유명한 이야기다. IMF 조기졸업에 큰 역할을 한 그는 3년 뒤 타계했다. 그가 쥐었던 아피스 만년필은 한은 화폐박물관에 전시돼 당시의 아픈 역사를 증언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