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9일 개봉한 영화 ‘상류사회’(감독 변혁) 속 장태준은 섬세하고 미묘한 결을 가진 인물이다. 오롯이 배우 박해일(41)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면들은 캐릭터와 영화의 매력을 한층 끌어올리는 요소기도 하다. 때로는 기민하고 때로는 유연한 태준의 모습은 박해일의 지난 작품을 떠올리게 만들기도 하지만, 이 다채로운 모습이 한 캐릭터에 집약되면서 관객들은 지금까지와는 또 다른 박해일의 ‘속’을 볼 수 있게 된다.
영화는 각자의 욕망으로 얼룩진 부부가 아름답고도 추악한 ‘상류사회’로 들어가기 위해 모든 것을 내던지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은 작품. 박해일은 경제학 교수이자 촉망받는 정치 신인 장태준 역을 맡아 수애와 부부 연기를 펼쳤다.
“‘상류사회’의 첫인상은 속도감이었어요. 혼자 드라마를 끌고 가는 게 아니라 오수연이라는 캐릭터와 호흡을 맞춰 각자의 방식대로 달려가는 지점이 좋았죠. 기존 영화와는 달리 낯설고 신선한 기분이 들었어요.”
장태준은 그야말로 ‘감정 종합세트’ 같은 인물. 다채로운 감정을 가지고 있으며 표현에도 거리낌이 없다. 박해일은 “어떤 환경 속 캐릭터가 가진 감정의 변화가 몰아쳤다”며 “한바탕 잘 놀았다는 느낌이 들었다”고.
“경제학과 교수였던 장태준이 정치에 입문하게 되고 상황에 따라 감정이 바뀌어요. 그런 변화가 큰 편이었고 휘몰아친다고 해야 할까요? 감정놀음이라는 기분이 드렸고 그걸 잘 해낼 수 있었던 캐릭터라는 느낌이 들어요.”
영화 ‘상류사회’의 매력은 장태준과 오수연의 관계성에 있다. 신분 상승에 대한 야망을 가감 없이 드러내는 두 인물은 일반적인 부부 관계가 아닌 묘한 파트너십을 자랑하는 사이. 박해일은 이를 “동료 같은 느낌”으로 해석했다고.
“두 캐릭터는 애정신도 전혀 없어요. 목표와 개성이 강한 캐릭터들이 애정 없이 무언가를 주고받는데 파트너십 또는 동료의 느낌이 강했죠. 대사나 감정을 주고받을 때도 친구처럼 대하려고 했어요. 제가 이렇게 부부 호흡을 길게 표현한 적이 없었는데도 (캐릭터의 관계성 때문에) 부담이 적었죠. 차진 매력이 드러났다고 봐요.”
일반적이지 않은 부부 사이를 일상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을 터. 박해일은 수애와 함께 상의하며 부부의 윤곽을 만들어나갔다고 설명했다.
“촬영 전에 ‘우리 부부를 어떻게 만들어볼까?’ 하고 이야기했어요. 당시 수애 씨와 말하기를, 전형적인 부부처럼 보이지 않고 직장 동료 같다는 거였어요. 그래서 겉으로 드러나는 게 아니라 팀워크를 발휘해 서로의 부족한 부분을 보완하는 것처럼 만들자. 그런 기분을 느끼면서 가보자고 했죠. 영화 말미에는 부부 같은 모습도 많이 나타나지만, 대체적으로는 그런 톤을 유지하고자 했어요.”
서로의 부족함을 채워주는 진정한 파트너십. 장태준에게 수연이 완벽한 동료였듯, 박해일에게도 수연은 최상의 파트너였다고.
“영화도 수애 씨 때문에 시작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수애 씨가 촬영 전, 저에게 ‘상류사회라는 작품을 함께 해보자’고 했고 저는 제작사를 통해 시나리오를 받아보았죠. 한 배우가 함께하고자 하는 배우에게 작품을 제안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에요. 고려해야 할 것도 많고요. 그래서 더 궁금해졌죠. 함께 해보지 않았던 배우가 내게 직접 ‘함께’ 할 것을 제안하다니.”
“수애 씨에게 왜 함께하자고 제안했는지 이유를 물었느냐”고 묻자, 박해일은 “직접 못 물었다”면서, “후회스럽진 않았는지 묻고 싶다”고 농담까지 했다.
“저는 너무 좋았죠. 과정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편인데 수애 씨는 상당히 인간적인 매력을 가진 배우예요. 부담 주는 성격도 아니고 분위기도 잘 맞추고 조화로운 편이죠. 각자 집중해서 (촬영분을) 잘 찍었어요. 또 감독님, 배우, 스태프들과 저녁 식사를 자주 했는데 항상 오늘 촬영분과 내일 촬영분을 고민하면서 정신없이 달려갔던 것 같아요.”
앞서 언급한 것처럼, 장태준은 복잡하고 미묘한 감정들이 마구 얽혀있는 인물. “감정 연기가 까다로웠겠다”고 묻자, 그는 “굴곡이 있는 인물”이라 답했다.
“학자였던 기질이 있으면서 뚜렷한 목표를 세우고자 정치에 입문하는 인물인데 그런 차이점을 보여주면 인물의 여러 가지 면들이 보일 거로 생각했어요. 그것이 잘못 보이면 어설퍼질 수 있으니 내적으로 감정이 요동치길 바랐죠. 그것에 집중했어요. 물론 혼자 해낼 수 있는 게 아니었고 아내인 오수연, 감독님에게 도움을 많이 받았죠.”
박해일은 구체적으로 연기하기 까다로웠던 부분을 짚으며 “요트 신이 가장 혼란스럽고 힘들었다”고 회상했다.
“자기감정을 폭발력 있게 드러내면서 혼란스러움이 가득해야 하니까요. 참치를 먹고 또 요트장에서 술주정하는 장면까지 참 어렵게 찍었던 것 같아요.”
첫사랑(영화 ‘국화꽃 향기’)부터, 몰락한 지식인(영화 ‘괴물’, ‘고령화 가족’), 미스터리한 남자(영화 ‘짐승의 끝’)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장르와 캐릭터를 소화해왔던 박해일. 최근 ‘상류사회’까지 휘몰아치는 ‘감정놀음’을 해온 그에게 약간의 사심을 담아 “박해일 표 멜로는 언제쯤 볼 수 있을까?” 물었다.
“보기 힘든 이유는 없죠. 다만 멜로라는 장르도 색감, 톤이 다양하니까 제가 해볼 만한 작품을 기다리고 있는 거예요. 저도 40대에 어떤 색깔의 영화를 할 수 있을지 기대되고 궁금해요. 극 중 수연이 태준에게 ‘때를 기다리는 사람이 아닌 만드는 사람이 되길 바란다’는데, 저는 기다리는 편인 것 같네요. 하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