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에 가장 좋은 건 미국이 투자하는 것이다. 그게 곧 북한을 공격하지 못한다는 확실한 징표다.”
우리나라 최고의 통일 전문가인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은 황방열 기자와 본인의 대담 형식 저서 ‘담대한 여정’에서 남북 경제협력 해법으로 “북한을 좀 더 후하게 지원해야 한다는 인식이 자리 잡아야 한다”며 이같이 말했다.
문재인 정부의 선(先) 경제공동체 후(後) 사회문화공동체 이후 통일로 이어지는 큰 크림에 대해 정 전 장관은 “물론 방향성은 그렇게 가야 하는데 속도는 매우 더딜 것”이라고 진단했다.
우리나라 통일해법으로 꾸준히 거론되는 ‘독일식 흡수통일’ 전략에 대한 재고도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정 전 장관은 “독일 통일을 흡수통일이라고 하는 개념은 잘못된 것”이라며 “동독 체제가 완전히 무너져서 서독이 점령하듯 들어가는 게 흡수통일”이라고 말했다.
그는 “독일 통일은 1969년 동방정책이 시작되면서 20년 동안 꾸준히 계속된 서독의 대동독 경제지원이 동력이 됐고, 그 결과 동독 민심이 서독으로 서서히 옮겨 왔다”며 “이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선거로 결정됐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동독 사람들이 서독과의 통합을 선택한 것”이라며 통상적으로 사용하는 흡수통일이라는 표현은 맞지 않는다고 했다.
남한과 북한 통일과정에서 생길 ‘통일비용’을 독일식으로 계산하면 안 된다는 점도 강조했다. 그는 “서독은 분단 전에 갖고 있던 동독 땅에 대한 부동산 권리를 인정해주고 동서독 화폐를 1대 1로 통합하는 잘못을 저질렀다”면서 “총선을 앞두고 동독인들 표심을 얻기 위해 이렇게 했지만, 결국 동독 사람들을 사회복지 비용으로 먹여 살리게 되는 바람에 통일 비용이 엄청나게 들어갔다”고 봤다.
향후 통일 한국이 되더라도 포퓰리즘(인기영합주의)을 떠나야지만 막대한 통일 비용을 줄일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6·12 북미 정상회담 이후 북한이 비핵화 길에 나서면서 미국의 대북제재가 줄어들 것으로 예상된다. 아울러 남북 경협에 대한 기대감도 높아지고 있다. 정 전 장관은 남북 경협 방향으로 제2·제3의 개성공단 설립이 아닌 ‘협력사업’에 방점을 찍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남북관계가 새로 시작되면서 북한에선 ‘이제 지원은 필요 없다. 협력사업을 하자. 북한 자본 51%, 외국 자본 49%로 주도권을 우리가 쥐겠다’라는 것”이라며 “김정은이 만든 20여개 경제특구는 개성공업지구(개성공단) 모델로 가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내다봤다.
구체적 방안으로는 “우리 기업체들도 개성공단 모델보다는 경제특구가 어디 어디 있는지 찾아야 한다”며 “거기에 어떻게 투자를 하면 그쪽도 좋고 우리도 성과를 낼 수 있는지, 그런 협력사업을 모색해야 한다”고 말했다.
정 전 장관은 한반도 ‘운전자론’을 주장하며 북미관계 해빙에 앞장서고 있는 문재인 정부에 대한 조언도 아끼지 않았다. 그는 “문재인 대통령이 어떤 면에서는 운이 좋았다”며 “그러나 이 운은 문 대통령 개인이 아니라 우리 민족에게 온 것이라고 본다”고 말했다.
이어 “지금 상황을 보면 문재인·트럼프·김정은 세 사람 모두가 세계정신의 구현”이라며 “문 대통령은 그런 점에서 세계정신의 꼭두각시라고 생각한다. 앞으로도 세계정신이 가는 데로 갈 것”이라고 전망했다.
마지막으로 정 전 장관은 ‘미국 변수’에 우려를 표했다. 북한의 경우 김정은 위원장이 북미 수교를 보장받기 위해 점진적으로 비핵화 길에 나아갈 것은 예상되지만, 미국은 정치 제도와 법률이 대통령 마음대로 하기 어려운 구조라는 것이다.
그는 “김정은은 독재자이기 때문에 2년이든 2년 반이든 해달라는 대로 확실하게 해줄 수 있다”면서도 “미국은 대통령이 어디 가서 약속하고 협정 체결하고 와도 의회가 ‘노(No·아니다)’하면 소용이 없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정 전 장관은 국회의원과 국민, 언론 역할을 강조했다. 그는 “우리 의원들도 미국 의원들에게 가서 ‘제발 우리 좀 편히 살자’고 얘기할 수 있어야 한다”며 “보수 야당도 평화에 반대하는 게 아니라면 친분 있는 미국 의원들을 설득해야 한다”고 했다.
이어 “우리나라 보수 야당이 계속 딴지를 걸면 그에 대해서 국민이 거세게 반응해야 한다. 언론도 마찬가지”라면서 “세상은 어차피 바뀌기 때문에 생각을 바꾸고 새로운 흐름에 올라탈 준비를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