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영길(人文自)의 공지마지] ​그날이 오면

2018-08-13 1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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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의사의 광복은 아직도 진행형이다

안중근 의사 [사진=위키미디어(wikimedia)]

 
“그 날이 오면 그 날이 오면은/삼각산 일어나 더덩실 춤이라도 추고/한강 물이 뒤집혀 용솟음 칠 그 날이..... //그 날이 와서 오오 그 날이 와서/육조(六曹)앞 넓은 길을 울며 뛰며 뒹굴어도/그래도 넘치는 기쁨에 가슴이 미어질 듯하거든/드는 칼로 이 몸의 가죽이라도 벗겨서/커다란 북을 만들어 들쳐 메고는/여러분의 행렬에 앞장을 서 오리다./ 우렁찬 그 소리를 한 번이라도 듣기만 하면/그 자리에 거꾸러져도 눈을 감겠소이다.”

일찍이 민족시인 심훈(沈薰)은 <그 날이 오면>에서 광복절의 기쁨을 노래했다. 우리의 광복절은 바로 ‘그 날’인 것이다. 올해도 어김없이 8월 15일 광복절이 찾아왔다. 1945년 우리나라가 일제의 식민통치로부터 벗어나 자주독립을 되찾은 지 어느덧 73년이 지났다.

광복은 결코 공짜로 얻어진 게 아니다. 국제정세의 긍정적 동인(動因)에도 기인했지만, 한민족의 피와 땀과 눈물의 결정체다. 이 '3가지 액체'는 동해와 서해로 엄청나게 흘러 들었으리라. 안중근 의사(1879~1910)가 흘린 피와 땀과 눈물도 이토 히로부미가 저격된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토크 앞 동해를 거쳐 중국 다롄 여순감옥의 앞바다, 서해로까지 이어졌다.

1910년 3월 26일 안중근 의사는 여순감옥의 사형장에서 최후의 유언을 남기고 순국했다. 두 동생 정근과 공근이 안 의사의 재판정과 형장을 내내 지켰다.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하얼빈(중국) 공원 옆에 묻어 두었다가 나라를 되찾거든 고국으로 옮겨다오. 나는 천국에 가서도 마땅히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해 힘쓸 것이다. 모두 나라의 책임을 지고 국민된 의무를 다하여 마음을 같이 하고 힘을 합하도록 일러다오. 대한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

안의사의 어머니, 조마리아 여사는 끝내 아들의 마지막을 보지 못했다. 수의를 지어 안의사 두 동생 손에 들려보낸 것이 마지막 이별이었다. 조여사는 맏이인 안의사에게 의연하게 항소를 포기하고 대의를 따르라고 강조했다. “비겁하게 삶을 구걸하지 말아라. 옳은 일을 하고 받는 형(刑)이다. 대의에 죽는 것이 어미에 대한 효다. 너의 죽음은 너 한 사람의 것이 아니라 조선인 모두의 분노를 짊어진 것이다.” 3년전 국경을 넘어 만주 벌판으로 간 맏아들은 사형수가 되었다는 소식을 전해왔다. 죄명은 살인. 아들의 총구가 겨냥한 인물은 힘없는 대한제국의 자주권을 강탈한 원수, 이토 히로부미(1841~1909)였다.

안 의사는 어머니께 유언을 남겼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자식의 막심한 불효와 아침저녁 문안인사 못 드림을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제 아들 분도는 장차 신부가 되게하여 주시길 원합니다. 후일에도 잊지마시고 천주께 바치도록 키워주십시오.”

하나 자식만큼은 평생 천주의 은총 속에서 살기를 바랐던, 안중근의 유언은 끝내 지켜지지 못했다. 옥고를 치르고 풀려난 아들들과 함께 정처없이 타국을 떠돌 무렵, 조마리아 여사는 일제의 손아귀에 일곱 살 난 손자 분도를 어이없이 잃고 만다. 안 의사 가족을 끈질기게 쫓던 밀정이 분도에게 독이 든 과자를 건넨 것이다. 신부로 키우고 싶었던 아이마저 독살돼 하늘의 아버지 곁으로 돌아간 비극 앞에서 안 의사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참담한 일은 그뿐이 아니다.

어머니 조 여사는 1927년 7월 15일 암투병중 66세의 나이로 중국 상하이에서 숨을 거뒀다. 안의사의 두 동생, 정근과 공근은 각각 상하이에서 객사하거나 충칭에서 암살당했다. 딸 안성녀는 독립군에게 군복을 지어 입히며 독립운동을 했으나 아직까지 유공서훈을 받지 못하고 있다.

5대째에 이르러 수백 명 가까이 불어난 후손들은 저마다 어렵게 살면서 몰락의 길을 걷다가, 해외로 뿔뿔이 흩어져 소식마저 끊어졌다. 조 여사의 유해는 상하이 내 프랑스 조계지에 묻혔으나 이제는 도시재개발로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다. ‘하얼빈에 묻었다가 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옮겨 달라’는 유언을 남겼던 안중근 의사의 유해 역시 중국 다롄 여순감옥 어디인가에 잠들어 있다고 추정할 뿐, 아직 찾지 못하고 있다.

안 의사가 순국한 지 108년이 지난 2018년. 서울 효창공원 내 안중근 의사 묘역은 홀로 광복절 73주년을 맞고 있다. 안중근 의사의 영혼도, 그리고 어머니 조 마리아 여사의 넋도 제대로 돌보지 못하는 대한민국 후손들로서는 참으로 부끄러운 날이다.

안중근 의사가 1909년 10월 26일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뒤 이듬해 3월 26일 형장의 이슬로 사라질 때까지 옥중에서 집필했던 ‘동양평화론’도 미완성이다. ‘마음을 같이 하고 힘을 합쳐서 공로를 세우고 업을 이루도록 일러다오’라고 절규했던 안중근 의사의 유언을 비웃듯 ,오늘 대한민국의 현실은 갈등과 분열의 양상까지 보이고 있다. 혹자들은 대한제국의 종말을 재촉했던 조선 유학자들의 사색당쟁(四色黨爭)이 재현되고 있다고 통탄한다.

지난 6월 28일 중국 다롄 여순감옥 안중근 기념관에 역사 학습차 견학 온 중국인 초등학생들 사이에서 초췌한 안 의사 영정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필자의 뇌리엔 조선시대 실학자 서유구 선생의 말씀이 불현듯 떠올랐다.

“흙으로 끓인 국과 종이로 만든 떡으로 백성을 먹여살릴 수 있다는 말인가. 그들은 고담준론(高談峻論)으로 나라의 도(道)를 논한다고 하는데, 그런 끝없는 관념적 논쟁으로 나라를 제대로 세울 수 있다는 말인가?” 진보와 보수세력 간의 치열한 명분 논쟁은 하늘의 안중근 의사를 슬프게 할 것이다. 미국과 중국, 일본, 러시아 간의 각축이 한반도를 둘러싸고 심화되고 있는데 말이다. 안중근 의사의 광복은 아직도 진행형이다.

                  - 곽영길(人文自)의 공지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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