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키 리라화 폭락이 글로벌 금융시장에 충격파를 던졌다. 안 그래도 강달러, 정정 불안, 무역전쟁 등으로 인해 신흥시장 투자자들의 불안이 커진 상황에서 터키발 위기가 시장 전반으로 전염될 것이라는 '도미노 공포'도 커지고 있다.
10일(현지시간) 터키 리라화는 달러 대비 14% 곤두박질치며 달러당 6.40리라를 기록했다. 2001년 이후 일일 최대 낙폭을 썼으며 사상 최저치도 갈아치웠다. 리라화 가치는 올해 들어서만 70% 가까이 떨어지면서 외환위기 경고음을 울렸다.
멕시코 페소화와 폴란드 졸티화도 각각 1% 이상 내리는 등 최근까지 리라화 움직임에 저항력을 보이던 통화마저 속수무책 흔들렸다. 2013년 미국 연준의 양적완화 축소(테이퍼링) 소식에 신흥국 자산이 급락했던 ‘테이퍼 텐트럼’ 이후 신흥국 도미노 위기의 첫 신호라고 로이터는 지적했다.
라보뱅크의 제인 폴리 외환 전략가는 파이낸셜타임스(FT)에 "신흥국 통화는 연초부터 무역전쟁 리스크와 미국의 금리인상에 약세 흐름을 지속했다”며 “여기에 터키 사태는 악재를 보탠 셈”이라고 말했다.
통화가치 붕괴는 상환해야 할 해외 부채가 많을 때 특히 위험하다. 빚을 갚기 위해 더 많은 돈이 필요하다는 의미이기 때문에 통화가치가 계속 떨어지면 채무불이행 위험도 높아진다. 국제금융협회(IIF)에 따르면 올해 1분기 터키의 외화 부채 비중은 국내총생산(GDP) 대비 70%로 세계에서 가장 높았다. 특히 달러 빚은 지난 10년 동안 3배나 증가한 것으로 집계됐다.
터키에 많은 대출을 해준 유럽 은행들도 경고등이 켜졌다. FT에 따르면 유럽중앙은행(ECB)은 스페인 BBVA, 이탈리아 유니크레디트, 프랑스 BNP파리바 등 터키 자산에 노출위험이 큰 유럽 은행들이 리라 폭락으로 인해 대규모 손실을 떠안을 수 있다고 경고했다. 이 소식에 10일 유로는 달러 대비 1% 이상 미끄러졌고 유럽 은행의 주가도 줄줄이 추락했다.
런던 소재 매뉴라이프자산운용의 리처드 시걸 선임 애널리스트는 블룸버그에 “유럽 은행들은 터키 자산에 대한 노출위험이 크기 때문에 터키의 경제 위기가 신흥시장뿐 아니라 시스템 전반으로 확대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최근 리라 하락이 가속된 것은 터키 정부가 앤드루 브런슨 미국인 목사 구금, 이란 제재, 시리아 문제 등을 두고 미국과 갈등하면서다. 지난 일주일 사이 리라 낙폭은 18%에 달했다. 10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터키산 철강과 알루미늄 수입품에 대한 관세를 각각 50%와 20%로 두 배 인상한다고 발표하면서 터키에 압박 강도를 높였다. 지난 1일 압둘하미트 귈 법무장관과 쉴레이만 소일루 내무장관의 미국 내 자산을 동결하고 미국과의 거래를 금지하는 제재를 가한 지 열흘 만이었다.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은 10일 연설에서 “장롱 속의 달러화를 팔고 리라화를 매입하라”고 호소했지만 미국의 제재에 따른 역풍을 막기엔 역부족이었다.
터키는 경상수지 적자가 급증하고 인플레이션이 두 자릿수로 뛰는 등 펀더멘털도 악화되고 있다. 통화 부양책을 옹호하는 에르도안 대통령의 절대 권력이 강화되면서 중앙은행의 독립성이 흔들리는 것도 위기설을 부채질한다. 캐피털 이코노믹스의 마스텐 헤세 이코노미스트는 CNN에 “경제 둔화와 채무 위기가 심화되면 터키는 자본통제를 실시하고 국제통화기금(IMF)으로부터 구제를 받아야 할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다만 FT는 “터키 리라화 약세가 심화되고 있지만 시장의 반응은 ‘패닉’과는 다소 거리가 있다”면서 "은행이나 금융 시스템 전반으로 위기가 확산될 가능성은 아직 낮다는 것이 많은 애널리스트들의 견해"라고 전했다. CNBC 역시 터키 시장 동요는 신흥국 시장의 고통을 가중시키고 유럽 은행들의 취약성을 부각시켰으나 아직까지 시스템 위기를 걱정할 단계는 아니라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