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공연한 리뷰] 증오를 선택한 '리처드 3세'…사연 없는 악인은 없다?

2018-06-17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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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 오스터마이어 연출…"리처드 3세는 허무주의자"

현란한 오프닝·과감한 연출…결말 등 아쉬움도

토마스 오스터마이어 연출 '리처드 3세'의 한 장면. [사진=LG아트센터]


"There is no creature loves me." (윌리엄 셰익스피어 '리처드 3세' 5막 3장 중)

생소한 독일어 사이로 영어가 간간히 들렸다. 그 중 가장 자조적이면서 슬프게 들린 구절이다. 나를 사랑하는 존재는 없다는 의미. 리처드 3세 스스로를 파멸로 이끈 원초적인 생각이기도 하다. 특히 'nobody'가 아닌 'no creature'라는 표현은 지독하게 염세적이다.
이렇듯 음울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셰익스피어의 희곡 '리처드 3세'가 연출가 토마스 오스터마이어의 손에 재탄생했다. 리처드 3세는 열등감에 휩싸인 채 왕이 되기 위해 피바람을 일으킨 인물이다. 공연은 과감하고 현대적인 독일식 연출과 개성 넘치는 배우들의 연기, 그리고 긴장감을 더하는 음향으로 꾸며졌다. 번역 또한 우리 정서에 최대한 맞춘 듯했다.

무대는 오스터마이어가 예고한 대로 반원형이었다. 배우들은 관객석 통로를 통해 등장·퇴장하며 무대와의 거리감을 좁혔다. 또 대사를 함께 외치도록 유도했다.

정면으로 2층짜리 구조물이 자리잡고, 중앙에는 마이크가 길게 늘어뜨려졌다. 이 마이크는 주로 리처드 3세가 속마음을 이야기(독백)할 때 사용됐다. 동시에 마지막 장면에서 리처드 3세가 거꾸로 매달려 올라가는 장치이기도 하다. 곱추인 몸을 지탱하던 코르셋을 벗은 채로 서서히 올라가는 모습은 마치 종교적 구원의 한 장면 같았다.

대사량은 방대했다. 주인공 리처드 3세 역의 라르스 아이딩어는 쉴 새 없이 읊조렸다. 한 번의 등장만으로도 강렬한 인상을 남긴 마가렛 왕비는 특이하게 남성인 로버트 베이어가 연기했다. 그가 저음으로 성 안 사람들에게 저주를 퍼붓는 장면은 다소 길게 연출됐지만, 내뱉는 말의 속도는 놀라울 정도로 빨랐다. 자막에서 더욱 눈을 뗄 수 없었다.

그리고 원작에서처럼 여성인 엘리자베스 왕비와 레이디 앤은 유약했다. 처음에는 사탕발림을 서슴지 않는 리처드 3세를 향해 분노를 표출하지만, 결국 모두 그의 농간에 넘어간다. 이 과정에서 리처드 3세는 앤에게 더할 나위 없이 솔직한 모습으로, 발가벗은 채 다가간다. 알고보면 이 또한 오만에 불과하다.
 

토마스 오스터마이어 연출 '리처드 3세' 한 장면. [사진=LG아트센터]


보즈워스 전투에서 패배해 죽음을 맞이하는 원작과 달리 이 공연에서 리처드 3세는 악몽 속을 헤매다 자멸한다. 분명 호불호가 나뉘는 결말이다. 앤의 죽음은 대사 한 줄로 처리됐지만, 살인 청부업자들이 런던탑에 갇힌 클래런스를 죽이는 장면은 말장난과 내적 갈등이 반복되며 비교적 길다. 오스터마이어는 인간 내면에 더욱 집중한 것으로 여겨진다.

오스터마이어는 리처드 3세를 사악한 광대이자 니힐리스트(허무주의자)로 표현했다. 하지만 그가 의도한 대로 리처드 3세에 동화되기는 쉽지 않다. 자신의 처지나 환경이 불우하다고 해서 모두가 세상에 대한 증오를 품지는 않기 때문이다. 어떤 삶을 살아갈 지 선택할 수 있고, 무엇보다 사람은 자신에게 관대한 경향이 있다. 매력적인 캐릭터인 리처드 3세가 연민은 유발하겠지만, 관객들이 스스로의 도덕성을 돌아보기에는 너무 자극적이다.

공연은 휴식시간 없이 2시간 30분 동안 진행된다. 작품을 처음 접하는 경우 배경지식이 요구되는 이유다. 시대적 상황에 더해 등장인물이 워낙 많은 데다 관계도 복잡해 '어렵다'고 느낀 순간 지루해질 수 있다. 일례로 엘리자베스 왕비는 딸과 이름이 같고, 에드워드 4세와 5세가 연이어 등장한다.

따라서 장미 전쟁으로 불리는 랭커스터 가문과 요크 가문의 싸움부터 튜더 왕조 등장까지의 흐름을 알면 연출 등 극적인 요소에 더욱 집중할 수 있다. 책과 영상물이 많아 접하기 쉽다. 특히 같은 시각물이지만 BBC에서 방영된 베네딕트 컴버배치 주연의 '할로우 크라운: 장미의 전쟁'을 통해 연극과는 또 다른 매력을 느껴보길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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