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섬의 어(語)?] '착하다'라는 말은 착하지 않다

2018-05-31 1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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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착하다’와 ‘선하다’는 다른 뜻이다

한자 善(선)을 '착할 선'이라고 흔히 풀이한다. 착하다는 말과 함께 선(善)하다는 말도 우리가 흔히 쓰는지라, 굳이 풀이하는 일이 동어반복처럼 여겨진다. 그런데 뉘앙스와 쓰임새를 곰곰히 따져보면, '착하다'와 '선하다'는 조금 다른 말이다.

'선하다'는 말은 어진 인성(人性)을 표현한, 비교적 무색무취한 표현이다. 선은 전통적으로 '악(惡)'과 대비된다. '악'의 요소들이 배제된 심성과 태도와 행동으로 '선'을 역추론 할 수 있다.
 

[공자(왼쪽)와 그의 제자 안회.]



# '모질다'의 반댓말?

'악(惡)은 '모질 악'으로 푼다. 악(惡)이란 한자를 들여다보면 '두번째(亞)' '마음(心)'을 합친 글자다. 단순하고 순수한 첫 마음이 아니라, 이리 돌려 생각하고 저리 뒤집어 생각하면서 만들어내는 교묘한 마음이다. 아(亞)는 아류(亞類)라는 말에 쓰이듯, '버금' '낮음' '저열함'을 의미하기도 한다. 즉 순수한 것보다 상대적으로 잘못되거나 나빠진 마음이다.

모질다는 것은 마음씨나 행동이 매섭고 사납고 독한 것이라고 해석하고 있으나, 사실상 세상에 해악을 끼칠 수 있는 위험한 마음이나 행동을 가리키는 심정적인 표출에 가깝다. 선하다는 말은 적어도 '세상'에 무해하다는 보증이라 할 수 있다.

# 본성의 어진 뿌리를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 선(善)

공자를 비롯한 유학자들은 인의예지(仁義禮智)를 인간 마음의 바탕에 있는 본질적인 것으로 이해했다. 사람이나 일이나 문제에 대한 어진 태도와 행동, 근본적으로 세상에 대해 옳은 것을 추구하는 마음과 행동, 공손하고 겸허한 관계 태도와 행동, 옛사람들의 바른 행동과 태도를 규범 삼아 자신을 가다듬는 일. 이것이 네 가지의 '뿌리마음(端,단)이라 말했다. 이것을 본성에 있는 그대로 발현하는 일을 '선(善)'이라고 보고, 그것을 담은 마음과 행동을 권장했다.

선에서 벗어난 것을 악(惡)이라고 규정하고 그것을 경계하고 말렸다. 권선징악(勸善懲惡)은 공자 프로젝트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왜 이것을 강조했을까. 공자는 왜 선을 그토록 권했을까.

# 선(善)은 위험사회를 반성행위로 교정하려는 공자프로젝트

전쟁과 수탈과 권력투쟁으로 황폐해진 당시 사회를 새롭게 포맷하기 위해서는, 자기의 마음속을 들여다보며 문제를 깨닫고 수정하는 '반성행위'가 반드시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 '위험사회'를 만든 지배자들이 핵심 타깃이었겠지만, 그런 혐의를 벗기 위해 인간 일반으로 보편률로 그것을 제시했을 것이다. 민심 또한 험한 세상을 살다보면 그악스러워질 수밖에 없다는 점을 감안하면 모든 인간의 마음속에 '선'을 심는 것이 가장 효율적인 '심전(心田)경작법'이었을 것이다.

# 처음엔 같은 말이었을, '선하다'와 '착하다'

'선하다'를 번역한 '착하다'는 말은, 처음엔 같은 말이었거나 '선하다'는 개념을 뚜렷이 이해할 수 있는 우리말이었을 것이다. 착하다는 말이 공자 프로젝트를 실천하는 말로 현실적으로 쓰이면서 이 말은 '선하다'에 비해 '진도'가 좀 더 나갔다.

즉 '선하다'는 말은, 심성이 곱고 어질다는 뜻과 '악하다'와 대비되는 뉘앙스였으나, '착하다'는 유교사회가 권장하는 도덕률을 스스로 잘 지키는 모범생이란 의미로 진화한다. 보편도덕률을 준수하는 측면만 보자면, '선하다'도 같은 개념이지만, 그것이 비록 보편도덕률이 아니라 할지라도, 체제나 권력자나 지도자가 원하는 경계 안에서만 생각하고 행동하는 일은 '착하다' 쪽에 더 가깝다.
 

[박근혜 전대통령에게 '나쁜 사람'으로 찍혀 공직에서 물러났다가 복직한 문화체육관광부 노태강 제2차관. ]



# 체제순응과 말 잘 듣는 을(乙)의 모습이 '착하다'?

즉, '착하다'는 순응적이며 말을 잘 들으며 손해를 보면서도 주어진 원칙을 묵묵히 지키는 태도를 가리킨다. 이 말은, 체제나 권력자나 지배자의 지시가 스스로의 각성에 비추었을 때 옳지 않다 하더라도 감수하고 그것을 따르는 의미까지를 포함해버렸다.

무조건적인 복종이 이 말 속에 스며들면서, '대책없이 착한' 인간은 손해를 본다는 세속적인 셈평이 생겨난다. 권선징악의 교과서격인 '흥부전'에 나오는 흥부는 어리석을 정도로 착하게 산다.

그러다 보니 찢어지게 가난하며(게을러서가 아니라 세상 시스템이 그를 가난하게 만들었다고도 볼 수 있다), 아이도 대책 없이 낳고(요즘 같으면 모범시민이다), 생계를 꾸리는 기본적인 경영(이 경영이야 말로, 유학자들의 견지에서 보면 탐욕의 시발점으로 볼지도 모르겠다)엔 젬병이다. 우화는 현실을 거꾸로 비추는 거울이다.

착하게 사는 사람은 대개 고통받고 이용당하며 궁핍하게 살다가 끝내 비참하게 죽는 경우가 태반이다. 그래서 '흥부전'이 나타나, 선악의 삐딱한 균형추를 바로잡아주려 한 것이다. 현실적인 방법으로는 안 되니, 제비까지 불러와 '판도라 박'을 타게 한다.

# 흥부의 죄명은 '착한 죄'

흥부의 죄는 '착한 죄'다. 하라는 대로 했을 뿐, 그 말씀을 곱씹고 응용하는 따위는 없었다. 그 결과는 딱 굶어죽기 좋게 돼 있다. 그런데도 동화는 '어쨌거나 착하게 살면 하늘이 도와줘도 도와준다'는 방식으로 무책임한 보증을 하고 있다.

'착하다'는 말에는, 권력의 갑을 관계가 상정되어 있다. '착해야 하는' 쪽은 '을'이다. 부모 말씀을 잘 들으면 '착한 아이'다. 어른 말씀을 잘 들으면 '착한 어린이'다. 선생님 말씀을 잘 들으면 '착한 학생'이다.

# 권력의 갑을관계가 스며들어간 착함... '착하다'는 착하지 않다

나랏님 말씀과 나으리 말씀과 사장님 말씀을 잘 들으면 '착한 당신'이 나온다. 그 말씀들이 모두 보편성을 지니고 있다면 공자의 프로젝트가 제대로 실행된 것이지만. 말씀들은 저마다 '갑' 입장에서 원하는 것이나, 불편하지 않은 것, 관리하기 쉬운 것, 취향에 맞는 것 등등이 외삽되어 있는 주문이라는 점이 문제라면 큰 문제다.

성서에 나오는 사마리아인은 '선한' 이란 관형사를 붙인다. 예수의 강의에 등장하는 선한 사마리아인은, 강도 피해를 당한 사람을 묵묵히 도운 의인이다. 사마리아인이 감동을 준 까닭은 그의 행위에도 있지만, 그의 신분 때문이다. 당시 최하층민이었던 그가 신과 예수의 뜻에 합당한 행위를 했다는 점이 청중을 놀라게 했을 것이다.

# 사마리아인은 왜 '선한' 사마리아인일까

계층과는 상관없이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어진 마음, 공자가 말했던 원천적인 '선'에 더 가깝지 않은가. '착한 사마리아인'이란 표현도 쓰지만, 굳이 '선한'이란 말을 쓰는 경우가 많은 까닭은, '착하다'는 말 속에 숨은 낌새를 대중도 이미 포착하고 있기 때문이다.

'참 잘했어요'와 '동그라마 5개', 그리고 '머리 쓰다듬어 주기' 따위로 표현되는 착함의 보상을 기억하는 많은 이들은, 착함이 개인적인 각성의 바탕 위에서 결정되거나 판단되는 마음이나 태도가 아니라, 상부에서 보여지는 것을 중심으로 평가되고 결정되는 것이라는 점을 경험과 더불어 깨닫고 있다. 그래서 이 '착하다'는 말이 지니고 있는 본질적인 의미를 잘 믿지 않는다.

# '착하지 않았던' 어떤 사람

전직 대통령이 '나쁜 사람'이라고 말하며 잘라냈던 어떤 공무원은, 다음 정부에서 복직을 시켰다. '착하다'는 말이 어떻게 오염되고 변질되는지를 뒤집어 보여주는 사례라 할 만하다.

                                이상국 아주경제 대표(CREATE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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