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시집살이, 전혀 안 했어요. 어머님은, 너는 며느리니까 내가 부리는 대로 해야 한다, 그런 생각 없으셨어요. 책임감이 보통 강하신 분이 아니에요. 어떤 일이라도 솔선수범 하세요. 연달아 딸 낳아도 서운해 하지 않으셨어요. 그 시절 노인 분들과는 많이 달랐어요. 많이 개화되셨고. 제가 어릴 적에 엄마를 잃었어요. 제게는 어머니에요. 딸처럼 대해주셨어요.”
옛날 일들을 질문 받을 때면, 수당은 담담히 “모든 게 내 운명이지”라고 혼잣말처럼 답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에게 운명이란 흔히 느끼듯 순응이나 체념과는 다른 맥락이었던 듯하다. 독립자금 조달하는 밀사나 임정 요인들 뒷바라지는 수동태와는 거리가 멀다. 수당은 민족 구성원으로서 응당 떠맡아야 할 책임을 운명이라는 두 글자로 에둘러 표현했던 게 아닐까.
“어머님은 굉장히 부지런하세요. 일처리를 참 잘하시고요. 그러니까, 임시정부 백 명 넘는 분들, 뒷바라지를 다 하셨겠지요. 아주 낙천적이시고. 원망이나 절망 같은 걸 모르세요. 조국에 돌아와서 그 고초를 겪으셨는데도, 내가 왜 이런 대접을 받아야 하느냐, 그런 말씀을 일절 입에 올리지 않으셨어요. 자신을 알리고 과시하는 걸 굉장히 싫어하셨어요.”
시집온 지 삼년이 지나자, 시어머니(김숙정 여사의 시할머니)는 친정에서 따라온 침모며 하인들을 다 보내버리고는, 다짜고짜 시아버지 동농의 두루마기를 지으라는 분부를 내렸다. 열세 살 꼬마 수당은 궁리 끝에 옷감을 방바닥에 펴놓고, 그 위에 두루마기를 덧댄 다음, 천을 잘라 옷을 지었다. 친정아버지가 붙인 “예쁘고 영리한 것”이라는 애칭은 딸바보의 역성은 아니었던 게다.
“시아버님 이야기는 별로 안 하셨어요. 북으로 끌려가시던 순간…. 가슴이 저미셨겠지요. 가끔, 너는 할아버지를 많이 닮았구나, 손자에게 그러셨어요. 애교가 있는 성품이 아니세요. 어느 남성보다도 담대하고 진취적인 분이시면서, 또 한국의 전통적 어머니들의 헌신을 실천하신, 그런 분이셨어요.”
수당은 아흔 하나의 나이에 눈을 감았다. 돌아가시기 석 달 전까지는 정정하셨다고 한다. 소식(小食)이었고, 보약 같은 건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특별한 지병도 없었다. 그저 나이 들어, 고통 없이 가신 게다. 하늘은 최후에는 선한 이의 손을 들어준다고 하지 않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