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당과 김자동, 김숙정 부부(1978)]
수당의 며느님, 김숙정 여사(김자동 임시정부기념사업회장 부인)는 인터뷰를 하는 동안 몇 번이고 눈시울을 닦았다. “저는 어머님 이야기만 나오면 가슴이 복받쳐요.” 팔순을 훌쩍 넘긴 며느리의 눈에서 그리움의 눈물이 하염없이 흐르도록 만드는 시어머니. 수당 자신은 회고록에서 “혹독한 시집살이를 했다”고 썼는데….
“저는 시집살이, 전혀 안 했어요. 어머님은, 너는 며느리니까 내가 부리는 대로 해야 한다, 그런 생각 없으셨어요. 책임감이 보통 강하신 분이 아니에요. 어떤 일이라도 솔선수범 하세요. 연달아 딸 낳아도 서운해 하지 않으셨어요. 그 시절 노인 분들과는 많이 달랐어요. 많이 개화되셨고. 제가 어릴 적에 엄마를 잃었어요. 제게는 어머니에요. 딸처럼 대해주셨어요.”
옛날 일들을 질문 받을 때면, 수당은 담담히 “모든 게 내 운명이지”라고 혼잣말처럼 답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에게 운명이란 흔히 느끼듯 순응이나 체념과는 다른 맥락이었던 듯하다. 독립자금 조달하는 밀사나 임정 요인들 뒷바라지는 수동태와는 거리가 멀다. 수당은 민족 구성원으로서 응당 떠맡아야 할 책임을 운명이라는 두 글자로 에둘러 표현했던 게 아닐까.
“어머님은 굉장히 부지런하세요. 일처리를 참 잘하시고요. 그러니까, 임시정부 백 명 넘는 분들, 뒷바라지를 다 하셨겠지요. 아주 낙천적이시고. 원망이나 절망 같은 걸 모르세요. 조국에 돌아와서 그 고초를 겪으셨는데도, 내가 왜 이런 대접을 받아야 하느냐, 그런 말씀을 일절 입에 올리지 않으셨어요. 자신을 알리고 과시하는 걸 굉장히 싫어하셨어요.”
시집온 지 삼년이 지나자, 시어머니(김숙정 여사의 시할머니)는 친정에서 따라온 침모며 하인들을 다 보내버리고는, 다짜고짜 시아버지 동농의 두루마기를 지으라는 분부를 내렸다. 열세 살 꼬마 수당은 궁리 끝에 옷감을 방바닥에 펴놓고, 그 위에 두루마기를 덧댄 다음, 천을 잘라 옷을 지었다. 친정아버지가 붙인 “예쁘고 영리한 것”이라는 애칭은 딸바보의 역성은 아니었던 게다.
“처음 뵈었을 때, 독립운동 집안인지 알고 있었지요. 그 험한 풍상을 겪으셨는데, 그때도 여전히 곱고 젊으셨어요. 체구도 조그마하세요. 당신은 잠시도 쉬지를 않으시면서, 남에게는 재게 움직이라는 말씀을 안 하셔요. 중국에서 해 드셨던 음식도 자주 해주시고. 우리는 그거 먹으면서 얘기 해달라고 조르고. 돌아가실 때까지 책을 손에서 놓지 않으셨어요. 내가 나이 먹어 보니까요. 돋보기 끼고 책 읽는 게 보통 힘든 일이 아니에요."
[아들 김자동과 며느리 김숙정의 결혼식(1955)]
분단이 굳어지면서, 임시정부의 주축이었던 한국독립당 인사들은 빛을 보지 못했다. 임정 식구들은 그 옛날 투차오에서 그랬던 것처럼, 서로 아끼며 왕래했다. 수당은 입이 무거운 편이나, 할 말은 하는 성미였다. 4․19가 나고 이승만이 쫓겨나자, 그는 학생들이 참 훌륭하게 잘 싸워주었다고 말했다. 희생이 너무 안타깝다면서.
“시아버님 이야기는 별로 안 하셨어요. 북으로 끌려가시던 순간…. 가슴이 저미셨겠지요. 가끔, 너는 할아버지를 많이 닮았구나, 손자에게 그러셨어요. 애교가 있는 성품이 아니세요. 어느 남성보다도 담대하고 진취적인 분이시면서, 또 한국의 전통적 어머니들의 헌신을 실천하신, 그런 분이셨어요.”
수당은 아흔 하나의 나이에 눈을 감았다. 돌아가시기 석 달 전까지는 정정하셨다고 한다. 소식(小食)이었고, 보약 같은 건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특별한 지병도 없었다. 그저 나이 들어, 고통 없이 가신 게다. 하늘은 최후에는 선한 이의 손을 들어준다고 하지 않는가.
[1970년대 정정화 여사 ]
수당의 소원은 통일이었다. 말수가 적은 어른이 “이 나라는 통일이 돼야 한다”는 말씀만큼은 아끼지 않았다. 그것은 평생을 따랐던 백범의 유지였으며, 조국 해방에 청춘을 바친 늙은 독립투사의 마지막 희망이자, 동갑내기 남편의 생사나마 확인할 유일한 길이었으리라. 시어머니를 보내드린 지 15년이 지나서야, 며느리는 한 번도 뵙지 못한 시아버지의 묘 앞에 큰절을 올렸다. 이 대목에서, 김숙정 여사는 끝내 울먹이며,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