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효백 칼럼-중국정치7룡] ​習 황제의 낙차 큰 어린 시절

2018-04-23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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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진핑 중국 공산당 총서기⑤

시진핑 누나의 성이 習가 아닌 까닭

좌로부터 시진핑, 동생 시위안핑, 부친 시중쉰[사진=강효백 교수 제공]

시진핑(習近平)은 1953년 6월 15일 베이징 정치수뇌부 집거지 중난하이(中南海)에서 당중앙 선전부장 시중쉰(習仲勳)과 치신(齊心)사이에서 2남 2녀 중 셋째이자 장남으로 태어났다. 시중쉰은 하오밍주(郝明珠)와 결혼했다가 1남 2녀를 낳고 1943년 이혼을 하고, 1944년 치신과 재혼했다. 시중쉰은 치신과 2남 2녀를 두는데, 시진핑은 그중 셋째다. 시중쉰의 자녀 총 7남매 중에서는 여섯째다.

국내외에서는 대충 시진핑의 이름을 베이징의 옛 이름 ‘베이핑’(北平)’에서 태어난 아이라는 뜻으로 지었다고 추정 보도하고 있는데 이는 사실이 아니다. 시진핑이 태어난 1953년은 중국 공산당이 1949년 10월 1일 톈안먼 망루에서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선포를 하며 장제스 국민정부 시대 지명 ‘베이핑’을 베이징(北京)으로 개명한지 4년째 되던 해다.

그러니 생각해보라! 공산당 중앙 수뇌부의 한 사람인 시중쉰이 난징(南京)이 수도였던 장제스 정부에 의해 ‘베이핑’으로 강등된 지명에 무슨 애정이 있다고 장남의 끝 글자 이름을 본땃겠는가?

사실은 이렇다. 고전에 해박한 시중쉰은 장남의 이름 '近平'을 ‘정치를 쉽게 해서 백성들에게 친근함이라는 ‘평이근인(平易近人)' 사기(史記)에서 따서 지은 것.
 

시진핑의 초등생 시절 모교, 베이징8.1학교[사진=강효백 교수 제공]


시진핑은 세 살 때부터 중난하이 북쪽에 인접한 베이하이(北海) 유아원 숙사에 맡겨졌다. 일곱 살 되던 해 1960년 당간부 자녀들이 입학하던 베이징 8·1 소학교에 입학, 합숙 생활을 했다.

검소하고 소박한 부모의 영향 하에 소년 시진핑은 누나들로부터 물려받은 옷을 입고 꽃신을 신고 학교를 다녀 아이들에게 놀림을 받았다.

시진핑과 누나 차오차오(橋橋)와 동생 위안핑(遠平) 세 아이는 주말에만 버스를 타고 집에 돌아왔다. 공사가 분명한 원칙주의자 시중쉰은 단 한 번도 자신의 관용차를 자녀들의 통학에 이용하지 않았다. 특히 시중쉰은 차오차오가 중학교에 입학하자 중국에서도 드문 성(姓)인 ‘시’(習)씨를 쓰면 누구 딸인지 알려져 주위에서 '알아서 길까' 우려해 딸의 성을 부인의 성인 ‘치(齊)’씨로 개성(改姓)했다.

시진핑이 만 아홉 살 되던 해, 1962년 9월 시중쉰이 ‘류즈단 사건’으로 하루 아침에 반당세력으로 몰려 몰락했다. 부총리였던 아버지가 뤄양(洛陽) 광산 부공장장으로 좌천 9계급이나 강등 방출되었다. 중난하이 가택은 몰수되고 시진핑은 어머니 치신을 따라 베이징 외곽 중앙당교 근처의 한 골목길 움막집으로 내쫓겼다. 하지만 총명하고 결기 강한 13세 소년 시진핑은 1966년 베이징 제일 명문중으로 손꼽힌 101중학에 입학했다. 그가 고급간부자제와 혁명열사 유자녀를 위해 설립된 명문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던 건 문화대혁명이 본격적으로 발동되기 전이었기에 전직 고관 자녀에 대한 일정수준의 배려가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으리라.

베이징 101중학은 원래 중국공산당이 1946년 홍군혁명특구 장자커우(张家口)에서 고급간부자제와 혁명열사 유자녀를 위해 세운 중등학교로 1951년 교사를 칭화대 근처에 이전했다. 따라서 101중학은 중국공산당이 베이징을 점령한 후 수도에 최초로 설립한 중등학교로 통한다. 국가부주석 정칭홍(曾庆红) 정치국원 리티에잉(李铁映),류치(刘淇) 등 ‘베이징 4중’과 함께 중국 정계고위인사를 가장 많이 배출한 명문중학교로 정평이 났다. 특히 축구부가 유명) [사진=강효백 교수 제공]



1966년 12월초, 수도 홍위병 연합행동위원회가 설립되지만 시진핑은 헤이방(黑幇·반동분자) 자녀로 분류돼 홍위병에 가담할 수 없었다.

문화대혁명의 최고조기 1968년은 홍위병에게는 광란의 한 해였지만 시진핑 일가에게는 비정의 한 해였다. 1968년 초 시중쉰을 ‘류즈단’으로 올가미를 씌워 몰아낸 문혁 극좌파 수괴 캉성(康生)의 부인 차오톄어우(曹轶欧)가 시진핑이 자기 아들이 다니는 101중학교의 동급생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는 “악! 반동분자의 새끼가 101중에 다니다니" 악을 쓰며 "101번 총살해도 모자랄 반동분자 새끼를 수용소로 당장 보내라” 광기를 부렸다.

시진핑은 즉각 ‘101중’에서 ‘헤이방’ 자녀들의 수용소 겸 특수학교로 개조한 ‘25중’으로 강제 전학조치되었다.

시진핑과 그의 형제·자매들은 ‘개새끼(狗崽子)’로 통했다. 아버지는 뤄양에서 어린 홍위병들에게 끌려와 갖은 수모를 당했다. ‘반당분자 시중쉰’이란 글씨를 목에 건 채 조리돌림을 당하고 인민해방군 위수지구의 독방에 8년간 장기 연금 조치되었다. 어머니 치신은 500인 반당분자 블랙리스트에 들어 7년간의 감호조치와 강제노동에 처해졌다. 그해 10월엔 아버지가 전처와 낳은 이복 맏누님 시허핑(習和平)이 ‘반동의 딸’로 홍위병에게 온갖 폭행과 모욕을 당해 견디지 못하고 스무살 꽃다운 나이에 자살했다.

1864년 미국의 기독교 감리교단이 세운 중국 최초의 서구식 학교 ’25중’문화대혁명 10년간 홍위병의 주 공격대상이 되어 철저히 파괴된 바 있다. [사진=강효백 교수 제공]


1968년 12월 마오쩌둥(毛澤東) 주석은 “지식청년(知靑)은 농촌에 내려가 가난한 농민의 교육을 받는 것이 필요하다”는 ‘상산하향’(上山下鄕)을 교시했다. 1,600만명의 중·고등학생이 농촌으로 내려가 노동에 종사했다. 15세 소년 시진핑도 1969년 1월 산시(陝西)성 북부 량자허(梁家河)라는 오지로 배치, 7년 동안 3평 남짓한 황토굴에서 생활을 시작했다. 큰 누나 차오차오도 네이멍구 생산건설병단에, 둘째 누나 안안은 산시(山西省)성 윈청(運城)현 생산대대 여공으로, 동생 위안핑은 너무 어려서 하방을 면하게 되었으나 중졸 이후 진학기회를 박탈하고 공장 선반 기능공으로 배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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