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일 개봉한 영화 ‘바람바람바람’(감독 이병헌) 역시 마찬가지다. 20년 경력을 자랑하는 바람의 전설 석근(이성민 분)이 여동생 미영(송지효 분)의 남편 봉수(신하균 분)를 바람의 세계로 인도하고, 그들 앞에 매력 넘치는 여성 제니(이엘 분)가 등장하면서 벌어지는 일을 그린 작품 속에서도 거부할 수 없는 마법 같은 매력을 가진 인물을 그려냈다.
아주경제는 봄바람처럼 나타나 타인의 마음을 쥐고 흔든 배우 이엘을 만나 작품과 연기관, 실제 모습 등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볼 수 있었다.
자신과 닮은, 공감할 수 있는 캐릭터를 연기하는 것은 어떨까? “닮았기 때문에 연기하기가 수월했느냐”고 묻자 이엘은 대번에 “그렇지 않다”고 답했다.
“저와 비슷한 캐릭터라고 해서 연기하기 쉬웠던 건 아니었어요. 비워내는 작업이 무척 어렵더라고요. 제니는 비워낼수록 아파 보인다고 생각했고 드러내기보다는 비워내는 작업을 진행했죠. 제가 이제까지 연기해온 캐릭터들은 화려함을 드러내는 인물이었잖아요. 그것과는 다른 느낌의 캐릭터를 만나다 보니 오히려 표정, 말투, 행동을 절제하려고 했어요. 점점 제니 감성으로 갈 땐 한숨 하나도 넣느냐 빼느냐고 고민이 됐었죠.”
그렇다면 이엘이 해석한 ‘바람의 여신’ 제니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그는 치명적 매력을 단순하게 섹시함으로 묘사하지 않고 “밝고 명랑한 모습으로 해석”하려 했다고 설명했다.
“제니는 자신이 가진 상처를 숨기려고 하는지 사람들을 대할 때 더 솔직하고 당당하려고 하는 것 같아요. 저도 그런 모습이 더 매력적이라고 생각했고 밝고 명랑한 모습을 극대화하려고 했어요.”
불륜을 소재로 한 작품인 데다가 치명적 매력의 소유자인 캐릭터다 보니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는 작업이었다. 자칫 비호감으로 느껴질 수 있는 캐릭터였기 때문이다. 이에 이엘은 제니를 ‘호감’으로 바꾸기 위해 어떤 노력을 했을지 궁금해졌다.
“석근과 봉수를 유혹하는 것에 포커스를 맞추지 않고, 사람을 좋아하고 인간에 대한 호기심이 왕성한 인물로 느껴지도록 했어요. 이 친구의 외로움, 상처를 치유해나가는 과정을 보여드리고 싶었고 그 부분을 더 신경을 썼고요. 그래서 오히려 메이크업, 의상이 내추럴해질 수 있었던 거예요. 감독님과도 이야기를 굉장히 많이 나눴고 저 혼자만 테이크를 많이 가기도 했었죠. 미세한 어감, 표현의 차이나 눈빛 하나하나까지 신경 쓰면서 뺄 건 빼려고 했어요.”
말 그대로 제니는 어려운 여자였다. 이병헌 감독마저도 고민과 고충을 늘어놓을 정도였으니까.
“감독님도 제니를 어려워하셨죠. 각색 작업 하실 때부터 어려운 캐릭터라고 하시더라고요. 하지만 오히려 그런 조심스러움이 제게는 편안함으로 적용이 된 것 같아요. 편안하게 작업할 수 있었어요.”
이엘은 영화의 시작부터 마지막까지를 아우르며 “제니의 개입으로 문제가 확산되는 게 아니라 소중함을 느끼고 옆 사람을 보게 되는 영화”라고 정의했다. 불륜 소재나 미화 우려에 대한 이엘만의 정리였다.
“전 그런 점들이 좋았어요. 저도 제니랑 비슷한 결을 가진 사람이라서요. 봉수 가족에게 받아들여지면서 제니의 치유 과정도 보일 수 있겠다고 생각했죠. ‘아, 얘도 행복해질 수 있겠구나’ 하고요.”
영화 ‘바람바람바람’은 체코 영화 ‘희망에 빠진 남자들’을 원작으로 한다. 이엘은 ‘바람바람바람’ 시나리오를 만나기 전, 원작을 접했다고 밝혔다.
“원작이 산뜻하고 재밌었어요. 저는 시나리오보다 원작을 먼저 봤거든요. 감독님께 원작을 재밌게 봤다고 말했고, 선배님들이 합류한다는 소식에 ‘무조건 하겠다.’, ‘미팅할 필요도 없다’고 했어요. 감독님이 어떻게 각색했을지 너무 궁금하더라고요. 원작의 요소들을 감독님이 어떻게 표현해냈을지도요.”
궁금증과 설렘을 안고 만난 이병헌 감독은 어땠을까? 이엘은 이병헌 감독의 디렉션에 대해 “치밀하고 완벽하게 구성돼 있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치밀하게 짜인 감독님만의 대사를 믿고 있었어요. 여기서는 우리가 웃겨야 해, 재밌게 해야 해 이런 생각보다는 감독님의 디렉션과 지시를 충실하게 따랐어요. 우리가 뭘 더 하려는 순간 어려워진다는 걸 알았죠. 시나리오 대본 디렉션 충실했어요. 오히려 감정선이 따라가기 쉽지는 않았죠. 한 신, 한 신 촬영하면서 만이 풀어졌던 것 같아요.”
지난 언론시사회 기자간담회에서 이엘은 “제니 역을 하면서 한 가지 궁금증이 있었다. 다시 사랑받을 수 있을까?하는 것”이라는 다소 의미심장한 발언을 남긴 바 있다. 제니 역할을 통해 깊은 고민을 꺼낸 것 같아 당시의 발언에 대해 조금 더 자세히 듣고 싶었다.
“제가 배우고 제니이기 전에, 인간 김지현(본명)으로서 가지고 있던 질문이었어요. ‘다시 사랑받을 수 있을까?’, ‘다시 사랑할 수 있을까?’ 모든 인간관계가 좋게 끝날 수 없잖아요. 느닷없이 잃기도 하고요.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직업이라 그런 고민을 하는 것 같아요. 모두에게 좋은 사람일 수는 없지만, 최대한 그런 고민이라고 할까요? 그런 지점이 시나리오를 읽을 때부터 보였어요. 그래서 기자간담회 때도 그렇게 말씀드렸던 거고요.”
이엘은 내성적이지만 호기심이 왕성, 자신이 관심이 가지는 대상에게는 열렬한 관심을 드러낸다고 말해왔다. 그런 성격들이 작품에도 영향을 미칠까? “적극적으로 대시 했던 작품이 있었느냐”고 묻자, 그는 “매 작품이 그랬다”며 간절했던 당시를 언급했다.
“지금까지는 제가 대시를 할 만한 상황도 아니었어요. 오디션 기회만 와도 감사할 때였죠. 한 작품, 한 작품이 귀하고 소중할 때였으니까요. 그래도 강하게 어필해본 작품들은 ‘내부자들’과 ‘광해: 왕이 된 남자들’이었어요. 정말 턱 밑까지 절실함이 있었죠. ‘하이힐’은 장진 감독님이 워낙 저를 잘 알고 계셔서 꿰뚫어 보시곤 했거든요. 강한 대시는 아니어도 그런 절실함이 드러났던 것 같아요.”
정말이지 바쁘게 달려왔다. ‘내부자들’로 세간의 관심을 한 몸에 받은 그는 드라마 ‘도깨비’, ‘화유기’ 등을 연달아 찍으며 활발한 활동을 이어왔다. 지금의 이엘에게 지난 작품들은 어떤 의미일까? 지난 작품들을 돌아보니 어떠냐고 물었다.
“예전에는 부끄러워서 제 작품을 잘 못 봤었어요. 그런데 요즘 시간을 내서 다시 보고 있어요. 제가 고갈되기 전에 다시 채워 넣어야 할 것 같아요. 환기하고 저만의 소스를 다시금 채워야죠. 요즘 그런 생각을 많이 해요.”
영화 ‘바람바람바람’의 제니로 많은 변화를 거듭했다는 이엘. 그에게 이번 작품이 차기작에 미칠 영향이나 변화가 있냐고 질문했다.
“현장에서 리허설하고 대화를 통해 안에서 만들어가는 작업을 하다 보니 전보다 더 유연해진 것 같아요. 현장에서 대처해야 할 것들이 공부가 되었다고 할까요? 다음 작품 만들 때도 그런 점들이 도움이 될 것 같아요. 그리고 이제까지 제가 보여드린 모습보다 많이 비워내야 하는 모습을 보여드려서 ‘이엘에게도 이런 모습이 있겠구나’를 보여드린 것 같고요. 아마 다음 작품을 만날 때는 더 잘 보여드릴 수 있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