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 = 배석규 칼럼니스트]

[사진 = 갈단]
갈단이 알타이산과 항가이산 사이의 지역에서 방랑하는 동안 강희제는 확실한 마무리를 위해 다시 2차 원정에 나섰다. 특히 갈단이 티베트와 연관이 깊은 인물이라는 점에서 티베트로 망명할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그 것을 차단하려 했다.
▶ 여유 있는 강희제 2차 원정

[사진 = 고비사막 낙타 행렬]

[사진 = 강희제 남순도]
▶ 절망적 상태에 놓인 갈단

[사진 = 고비사막]
중간에 거치게 되는 지역은 자신의 딸이 시집간 호쇼트부 지역이고 티베트는 스승인 달라이 라마 5세가 있는 곳이어서 여기에 기대를 걸었다.
▶ 무위로 끝난 티베트 접촉
12월 들어 갈단은 티베트로 가는 160명의 사절단을 구성해 달라이 라마와 섭정에게 보냈다. 물론 여러 가지 딱한 사정을 설명한 편지도 함께 지참 시켰다. 하지만 통로를 가로막고 있던 청나라 병사들에게 붙잡혀 사절단은 억류되고 편지는 압수됐다. 설령 사절단이 청군에게 붙잡히지 않고 티베트까지 갔다 하더라도 갈단의 사정이 나아질 것은 사실상 별로 없었다.
왜냐하면 실제로는 아무 곳에도 갈단을 도와줄 세력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준가르는 말할 것도 없고 청해의 호쇼트부도 이미 청나라 쪽으로 기울어져 있었고 티베트의 사정도 마찬가지였다.
▶ 끝나 가는 갈단의 운명
스승인 달라이 라마 5세는 이미 16년 전에 죽었지만 단지 알려지지 않고 있었을 뿐이었다. 당시 티베트의 모든 권력은 섭정인 상게 갸쵸가 쥐고 있었다. 상게 갸쵸는 달라이 라마 5세가 죽은 후 이 사실을 감추고 선정(禪定)에 들어갔기 때문에 사람을 만나지 않는다고 선전했다. 선정이란 성불하기 위해 마음을 닦는 수행을 말한다.

[사진 = 아르항가이 테하르 바위]
갈단은 호교 칸인 활불로서 티베트 불교의 수호자라는 명분을 갖고 몽골 정벌에 나섰지만 어려운 처지에 빠지자 티베트가 그를 버렸던 것이다. 그렇다고 본다면 당시는 사방에 둘러싼 세력 모두가 갈단에게서 등을 돌리고 있었다는 얘기가 된다. 그런 만큼 갈단의 운명도 사실상 끝나가고 있었다.
▶ 비참하게 생을 마감한 갈단
두 번째 원정을 마치고 북경으로 돌아갔던 강희제는 한 달 남짓 뒤 세 번째 원정에 나섰다. 이번에는 갈단의 진영을 직접 공격해 그와의 대결을 끝내려 했다. 강희제는 만리장성을 따라 옛 서하제국의 수도 영하까지 이동한 뒤 그 곳에서 갈단에 대한 토벌을 준비했다.

[사진 = 은천(영하회족자치구)]
▶ 53살에 접은 통합의 꿈

[사진 = 40대 강희제]
▶ 자살 여부에 대한 논란

[사진 = 강희제, 對갈단 승전비 (몽골국립박물관)]
갈단은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 없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다. 갈단은 고승 웬사 투르크의 전생으로 태어난 활불이다. 비록 환속을 했다고는 하지만 활불로 살아온 사람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죄를 저지를 수 없다는 것이 그들이 제시하는 근거다.
강희제가 갈단이 자살했다고 여기고 있고 청나라의 사료들이 그가 독을 마시고 자살했다고 기록해 놓은 것은 강희제와 청나라를 고생시킨 갈단에 대한 미움 때문에 그를 활불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데서 비롯됐다는 설명이다.
▶ 갈단의 죽음에 대한 강희제의 감회
여하튼 2년 이상 갈단을 제거하는 데 매달려온 강희제로서는 그가 죽은 데 대한 감회가 당연히 특별했을 것이다.
"나는 이제 큰일을 끝냈다. 2년 동안 세 차례나 직접 원정에 나서면서 바람에 쓸리고 비에 젖은 사막을 건넜다. 황량하고 사람도 없는 벌판에서 하루걸러 식사를 했다. 사람들은 그 것을 고생이라고 말하겠지만 나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그런 것을 피하려 하겠지만 나는 그러지 않았다. 끊임없는 이동과 고난이 이 같은 위업을 이끌어 냈다. 갈단이 아니었으면 나는 결코 그런 일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천지신명이 나를 보호해 이런 위업을 갖다 주었으니 내 인생은 성공한 것이라고, 또 행복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으리라."
강희제가 원정 중 갈단이 죽었다는 소식을 접한 뒤 북경에 보낸 편지의 내용이다.
▶ 바람 속에 날아간 버린 갈단
세 번째 원정을 마친 강희제는 북경으로 돌아갔다. 죽은 갈단의 시체는 곧바로 화장돼 유골만 남았다. 갈단의 심복이었던 단지라는 갈단의 유골을 소지한 채 갈단의 딸을 데리고 도주 길에 올랐다가 체왕 랍탄의 준가르군의 습격을 받아 유골과 갈단의 딸을 빼앗겼다. 강희제는 갈단의 유골과 딸을 인도해줄 것을 준가르에 요구했다.

[사진 = 보이르호의 석양]
갈단이 이루려 했던 제국도 미완의 형태로 바람 속에 사라져 버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