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대에서 1970년대 초반, ‘만주 웨스턴’ 영화가 유행을 타던 때가 있었다. 미국 할리우드의 서부 활극을 흉내낸 장르로 만주독립군의 전투와 이들을 돕는 여성의 로맨스가 골격을 이루는 영화들이었다. 1970년 김영효감독의 ‘황야의 외팔이’나 1971년 이만희감독의 ‘쇠사슬을 끊어라’도 그런 트렌드 속에서 만들어졌다. 만주웨스턴은 광활한 만주 벌판을 배경으로 이국적인 풍경 속에서 반공 민족주의를 강조하며 권선징악과 활극의 오락을 버무렸는데, 미개지를 정복하는 제국주의의 침략을 미화하며 문명의 폭력과 탐욕을 선으로 포장하던 미국 서부영화들만큼 각광을 받지는 못했다. 만주에 대한 우리의 입장과 처지가 당당한 서부개척과는 근본이 달랐기 때문일까. 2008년에 김지운감독이 만든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은 만주웨스턴의 향수를 부른 작품이었다. 역사적 사실의 재현 여부를 제쳐놓고라도, 만주가 우리 앞에 이렇게 다시 나타났다는 것만으로도 감회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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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만주를 배경으로 한 영화 '좋은놈,나쁜놈,이상한놈'의 한 장면.]
1883년 서북경략사인 어윤중은 백두산 정계비를 조사하여 ‘서위압록(西爲鴨錄) 동위토문(東爲土門)’이라는 여덟 글자를 확인하고 토문강 이남에 있는 간도가 조선의 영토라는 견해를 조정에 보고한다. 1885년과 1887년 두 차례에 걸쳐 조선과 청나라는 국경 교섭을 진행하였으나 결렬된다. 1908년 일본은, 3년전 을사보호조약으로 조선의 입을 묶어놓은 상태에서 청나라와 간도협약을 맺는다. 일본이 간도 영유권을 포기하고 청에게 넘겨주는 대신 안봉선(安奉線) 개축권과 무순탄광 운영권을 얻는 협약이었다. 분쟁 당사국인 우리는 제외된 채 맺어진 어이없는 결탁이다. 하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조선인의 간도 이주는 계속됐다. 1909년 98,500명이던 조선인이, 20년 뒤인 1929년엔 382,405명으로 불었다.
일제시대 만주의 이미지는 몇 겹이 겹친다. 농지와 일자리를 찾아 몰려든 조선인들의 삶은 김동인의 단편 ‘붉은 산’에도 비친다. 처절한 궁핍 속에서 아귀다툼같은 삶이 펼쳐지던 만주. 이것이 만주의 첫째 이미지인 ‘고통과 추위의 땅’이다. 남자현처럼 독립전쟁을 펼치는 사람들이 몰려들면서 이곳은 항일운동의 중요한 근거지가 된다. 두 번째 만주 이미지는 ‘레지스탕스의 땅’으로 저항이 숨쉴 수 있었던 공간이다. 당시 만주는 일제가 대륙을 삼키기 위해 개발을 서두르고 있었고 특히 조선인 이주를 통해 지배권 합리화를 꾀하던 ‘동화(同化) 프로젝트’의 전략적 변경이었다. 이런 가운데 조선인에게는 그곳이 ‘기회의 공간’으로 떠오른다. 마지막으로 야만과 부패의 땅이다. 일본이 세운 만주국은 왕도락도(王道樂土)를 표방한다. 만주족, 몽골족, 한족, 일본인, 조선인 등 서로 다른 5개 민족의 화합 국가를 만든다는 것이었다. 이같은 야심을 바탕으로 일본은 조선인 자본가의 만주진출을 독려한다. 일본 경찰은 이곳에서 항일집단의 색출 이외에는 관심이 없었으므로 치안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 신경(新京)인 장춘과 하얼빈을 중심으로 아편 밀매가 성행하여 지식인 아편중독자가 대거 생겨났고, 사회 질서가 구축되지 않은 가운데 마적 갱단이 활보를 하며 전쟁을 벌이던 곳이었다. 부패와 활극이 시끌벅적하게 진행되던 만주, 이것이 ‘만주 웨스턴’을 이루는 핵심 이미지이기도 했다. 이상국 아주T&P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