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스페셜-독립투사 남자현⑤]신촌서 선언서 뿌린 그녀, 만주행 열차를 타다

2018-02-01 1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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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터넷도 없던 시절에 펼친 놀라운 플래시몹, 3.1운동

1918년 11월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났다. 미국의 윌슨대통령은 그해 1월 ‘민족자결주의’를 새롭게 다가올 세계질서로 내놓은 바 있었다. 국내외서 독립운동을 하던 모든 이들은, 11월 이후 일제의 움직임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전쟁 마무리를 위해 파리강화회의가 열린다는 정보가 돌았다. 우리 민족의 뜻을 알릴 좋은 기회였다.
 

[사진 = 삼일운동 기념 부조]


그러나 우리보다 일본의 목소리가 훨씬 더 큰 게 현실이었다. 일본은 조선이 자발적으로 그들의 통치를 받아들이고 있으며 일본 덕분에 이 나라가 크게 발전하고 있다고 선전할 것이다. 우린 이 터무니없는 목소리를 어떻게 이길 것인가. 그게 문제였다. 일제 침략의 부당성을 알리는 아주 큰 목소리를 내자. 어떻게 내는가. 온 민족이 한꺼번에 달려나와 만세를 부르는 것이다. 대한독립이여 영원하라. 그게 우리의 뜻이다. 이민족의 압제에 숨도 겨우 쉬며 살아가던 겨레가 인터넷도 없던 시절에 마음과 마음을 무선으로 연결하여 플래시몹(flashmob)을 연출한 것이다. 단지 만세만 부르는 비폭력 시위였지만 일제는 경악했다. 한민족의 지혜와 용기, 그리고 단결을 부정하려고 총을 쏘고 칼과 쇠갈퀴를 휘둘렀다. 석달간 7,509명이 살해됐다. 3.1운동은 결코 말살할 수 없는 민족성의 힘을 보여준 세계 평화시위의 꽃이었다.

# 김씨부인의 편지 받고 만세운동 하러 상경

시골 여인 남자현은 이 운동을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그녀는 1919년 2월말에 간단한 봇짐을 들고 46년을 부비던 고향을 떠났다. 얼마전인 2월26일 서울 남대문통에 사는 김씨부인의 편지를 받았고 그녀는 상경을 결심했다. 서울에서 외치는 만세소리에 자신의 목소리도 꼭 포함되어야 하기 때문이었다. 23년을 꾹꾹 눌렀다. 가슴 속에 뚝뚝 듣는 피를 담아 외치고 싶었다. 편지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다음달 3월1일 조선민족의 만세운동이 있을 것입니다. 연희전문학교 부근의 교회당에서 그날 아침 만납시다.” 묻혀있던 이 나라 최고의 여성 독립투쟁가를 광활한 땅으로 이끌어낸 김씨 부인은 누구였을까. 수비교회나 계동교회의 부흥회 때 만난 사람과 연결된 신자이거나 종교 지도자였을 가능성이 크다. 남자현이 의병 지원을 통해 맺어둔 투쟁가 네트워크의 사람일 수도 있다. 그녀는 서울 신촌에서 그해 3월1일을 맞았다. 약속 장소에서 그 부인을 만났고, 교회 신자들과 할 일을 협의한 뒤 오후 1시 ‘조선독립선언서’를 배포하면서 만세를 외쳤다.

이쯤에서 47세 여인 남자현과 17세 소녀 유관순이 맞은 3.1 만세 운동을 겹쳐서 생각해보자. 1919년 3월1일 오후 1시 남자현은 신촌에서 선언서를 배포하고 있었고, 이화학당 고등과 1학년인 유관순은 학내 비밀모임 ‘이문회(以文會)’ 회원 6명과 중구 정동에 있는 학교 뒷담을 넘고 있었다. 

# 유관순과 남자현의 같은 길, 다른 길

유관순은 3월5일의 남대문역(서울역) 만세 시위에도 참가해 보신각까지 행진하는 1만 여명의 대열에 끼었다. 10일 조선총독부는 중등학교 이상의 모든 학교에 대해 임시 휴교령을 내렸고, 유관순은 하는 수 없이 독립선언서를 몰래 몸에 숨긴 채 고향인 천안으로 내려간다.
 

[사진 = 이화학당 시절의 유관순과 학우들.]



이 소녀의 활약이 두드러지는 것은 아우내장터에서 있었던 4월1일의 만세운동에서였다. 그녀는 이 모임을 기획하고 사람들이 손에 들고 흔들 수 있는 태극기를 밤새 만들었으며 전날밤 봉화를 올려 각 지역의 호응을 확인했다. 이튿날 소녀는 대중 앞에서 “나라 없는 백성을 어찌 백성이라 하겠습니까? 우리도 독립만세를 불러 나라를 찾읍시다”라는 내용의 연설을 한다. 유관순은 징역3년형을 받았으나 계속 불복하고 상위법원으로 공소한다. 법원에서 그녀는 이렇게 발언한다. “너희들은 우리 땅에 와서 우리 동포들을 수없이 죽이고 나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죽였으니 죄를 지은 자는 너희들이다. 우리들이 너희들에게 형벌을 줄 권리는 있어도 너희들이 우리를 재판할 어떤 권리도 명분도 없다.” 1920년 3월1일을 기해 옥중만세 운동을 주동한 뒤 그녀는 모진 고문 끝에 죽음을 맞는다. 독립선언서를 배포하던 남자현은 비슷한 현장에 있었지만 좀 다른 길을 걸었다.

휴교령 이후 서울은 더욱 삼엄했고 일제는 히스테리컬했다. 어디든 검문이었고 어디든 들이닥쳤다. 교회 사람들은 며칠만 좀 숨었다가 활동을 개시하자고 했지만, 원하는 투쟁을 하기엔 서울은 너무 좁게 느껴졌다. 나는 왜 이런 질곡의 역사 속에 태어났으며 이토록 고통받는 땅 위에 피어났는가? 그 질문에 답하기 위해 나는 떠날 것이다. 영양에서 연결해놓은 만주의 지인들을 찾아, 새로운 ‘남자현’이 되리라. 열흘 간의 고뇌 끝에 내린 결정이었다. 

# 정동교회 손정도 목사와의 만남

남자현은 만주로 떠나기 전 일 주일간 서울에 있으면서 그녀의 일생에 큰 영향을 주는 한 사람을 만난다. 1915년에서 1918년까지 정동교회 담임목사를 지냈던 손정도(1882-1931)이다. 유학에 밝은 손목사는 조선식의 학문과 교양을 갖춘 남자현을 한 눈에 알아보았다. 당시 38세인 종교인 독립운동가와 47세로 아홉 살 연상인 큰 누님뻘 보통 아줌마는 정동교회 한켠에 놓인 책상 앞에서 서로를 찬찬히 바라보았다. 남자현의 눈에 흐르는 비범하고 형형한 빛이 손목사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그녀가 만주로 가겠다는 결심을 밝혔을 때 그는 놀랐다. “조선에서 여인 나이 47세면 규방에 깊이 들어앉아 자손의 교육이나 집안 살림에 매진해야할 때이거늘, 그 젊지 않은 춘추의 몸을 이끌고 만주로 가신다니요? 8년전에 제가 선교사로 가 있을 무렵에 겪은 고초와 도처에 깔려있던 위험들을 생각하면, 참으로 말리고 싶은 일입니다.”

“내 나이 스물 네 살에 남편이 고향 앞산에서 병신년에 창의한 의병으로 순국한 뒤 유복자를 키워 그 아이가 스물 네 살이 되었소이다. 홀로 계시던 시어머니께서 의병모(義兵母)라는 이유로 왜비(倭匪)들로부터 불의의 행패를 당해 크게 다치셨고 한 동안 자리보전하시다가 끝내 돌아가셨을 때 며느리인 저는 분하고 슬퍼서 몇 번이나 혼절하였더이다. 그후 나는 많이 살았으니 당장 죽어도 여한이 있을 리 없지만, 유곡(幽谷)에 들어앉아 흐지부지 살기에는 왜(倭)에 대한 한(恨)이 너무 크고 뚜렷하여 그것을 풀고가는 것이 그간 은혜지은 인연들에 대한 보답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다행히 안동과 영양의 내외척(內外戚) 뿌리들이 만주 일대에 건너가 있는지라 그들과 호응하여 일을 하면 뜻한 바를 이루지 않을까 합니다.”

두 사람은 서로 고개를 끄덕이며 만주 결행(決行)을 다짐한다. 남자현은 1919년 3월9일에 만주로 향하고, 손목사는 4월에 상하이 임시정부로 간다. 그녀의 열차 수속은 손목사가 해결해준다. 9일 새벽 경성역에서 남자현은 아들 김성삼을 만난다. 성삼은 영양에서 안동으로, 안동에서 김천으로 이동하여 거기서 기차를 타고 경성에 도착했다. 모녀는 상인 복장 차림으로 만주행 열차에 오른다. 의주를 지나 랴오닝성 안동(安東, 지금의 丹東)에서 내렸다. 거기서 네 바퀴로 된 마차를 타고 육로를 달렸다. 이상국 아주T&P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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