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소앙(1887-1958) 선생이 쓴 <여협(女俠) 남자현전>
선생은 성이 남(南)이고 휘를 자현이라 하며 경상북도 사람으로 고향에 있을 때는 집안이 부유했다고 한다. 18세에 동향 사람과 혼인하였는데 1년이 채 지나지 않아 적국의 세력이 창궐하여 조국이 망하게 되었으니 소위 합방조약이 체결되었다. 이때 선생의 나이 겨우 19세였다.
비분강개하여 눈물을 흘리며 남편에게 말하기를 ‘나라가 망했는데 가정만 온전할 수는 없습니다. 집이 불타고 있는데 불을 쬐면서 희희낙락하겠습니까. 저는 이미 죽기를 각오하고 나라의 원수를 갚을 생각입니다. 원컨대 죽어 지하에서 서로 보도록 합시다.’라고 했다.
# 건국대 박영석교수의 남자현 학술연구발표(1994.10)
남자현의사는 1906년부터 부친인 남정한과 함께 의병전쟁을 전개하였다. 그(부친 남정한)의 제자 70여명이 모두 후일 의병활동에 참가하였다는 사실만 보아도 가히 짐작할 수 있다.
1907년에는 군대가 해산되기에 이르렀다. 이에 남자현의사는 친정 아버지 남정한이 궐기하자 이에 남편의 동지였던 박철호, 남하진 등과 함께 의병전쟁에 앞장 서서 참여하였다.
남자현의사는 직접 의병을 모집한다든가, 일본군의 동태를 파악하고 정보를 수집한다든가, 적의 후방을 교란시키는 등 감히 남성도 하지 못하는 일을 맡아서 수행하였다. 이와 같은 남의사의 항일열의는 가히 주위 사람들을 감탄케 하였으며, 남의사를 항일의 화신이라고 부르게 하였다.
남자현의사는 점점 더 심해지는 일제의 탄압 속에서도 꾸준히 지하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그 와중에서도 남의사는 항상 국제정세의 변화와 국내의 돌아가는 추이를 관망하는 것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보다 효과적인 항일투쟁의 기회를 엿보기 위한 것이었다.
홀로 계시는 시어머니와 유복자 성삼을 보살펴야 하는 남자현의사는 고향에 남아 있으면서 독립운동에 부심할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