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스페셜-독립투사 남자현①]스토리텔링詩 - 암살의 새벽

2018-01-29 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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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년 4월 혜화동 28번지, 밤새도록 권총을 닦는 한 여자가 있다

남자현 스토리텔링詩 - 암살의 새벽


                             혜화동 새벽 두시, 비가 내린다

호각소리 들리는 새벽 두시
죽은 자의 머리카락같은 빗소리 몇 올
어제 총맞은 자들인가 호각의 비명따라
움찔움찔 흘러내린다
1926년 4월 혜화동 28번지 고선생댁 마루방 지하
밤새도록 권총을 닦는 한 여자가 있다
싸늘한 총구를 맨가슴에 대며 자기를 묻는(問)
질문이 있다
나는 왜 사람을 죽이러 왔는가
나는 왜 제국을 죽이러 왔는가
 

[사진 = 여성 독립투사를 다룬 영화 '암살'의 포스터.]


















한 사람을 죽이는 것이 만 사람을 살리는 길이라고
그 심장을 쏘는 것이 백만의 심장을 뛰게하는 번개라고
쓰러져 말라붙은 북만(北滿)이 등 뒤에서 울고
압록강 바람이 치밀어올라 옷자락을 펄럭이게 하는
귀신도 눈 부릅뜬 비원을 품고 왔다
이 가슴이 총이라면 이 온몸이 불같이 터지는 포신(砲身)이라면
싸늘한 심장과 얼음 입술
눈물 없는 관자노리
오직 한번 뜨겁게 죽기 위하여 이토록 견고한 냉담을 유지하는
내 몸이여 너를 닦는 것이다 너의 피와 너의 살
빗소리로 걸레를 축여 네 뜻을 닦아내는 것이다
늦어도 내일 모레까지
제국은 무릎을 꿇고 주저앉을 것이다
이 비 그치기만 하면
죽은 자를 우는 비가 내릴 것이다
닦아도 닦아도 그치지 않는
피가 내릴 것이다
아들아 나는 여자가 아니다 네 어머니가 아니다
나는 나라 잃은 나라의 남편 잃은 아내이다
나라 잃었을 때 나도 잃었고 남편 잃었을 때
여자도 잃었다 내 죽음을 슬퍼하지 말아라
나는 슬프게 죽지 않았다 나라를 잃은 그날부터
내 몸은 강토(疆土)였다 겨우 숨쉬며 미친 듯 쏘다니는
조선이었다 내가 슬픈 것은 제 몸 건사하지 못하는
아픈 땅이다 죽은 한성(漢城)의 칠흑같은 어둠이다
한 사람을 죽일 총구는
생각보다 작구나 역사를 끝장 낼 한 방의 총성은
낮고 짧은 것이다 십육년 악마같은 제국의 심장에 쏘아 박을
한 여자의 소망은 이토록 작은 것이다
피도 눈물도 아닌 한 줄기 화약연기가 말하는
늙은 촌로(村老)의 넋두리같은 것이다
심장이 왼쪽이더냐 오른쪽이더냐
내 심장과 반대쪽이더냐 같은 쪽이더냐
비통한 황제의 주검 앞에서도 나는 눈물을 아꼈다
백만의 눈물방울을 거둬 여기 총구에 잴 뿐이다
지금 창덕궁엔 밤을 새운 혼이 나를 기다리고 있으리
내내 저벅거리던 발자국 소리 그쳤다
호각소리 그쳤다 비도 그쳤다
사이토 마코토,
적막 속에서 부옇도록 닦아온 총을
내 입속에 넣으며 나는 듣는다
나는 조선의 총구(銃口)다
나는 조선의 총구다
일제의 심장을 겨누는 조선의 심장이 뛰고 있나니
너를 죽이마
내가 죽이마

빈섬 이상국 아주T&P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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