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영걸 칼럼] 운명과 인연

2017-12-26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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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영걸 칼럼]

 

    [사진=윤영걸 초빙논설위원]



운명과 인연

‘바보’와 ‘무소유’의 만남. 한국인이 가장 존경하는 종교지도자인 김수환 추기경(2009년 2월 선종)과 법정 스님(2010년 3월 입적)은 생전에 아름다운 인연(因緣)을 쌓았다. 1997년 법정 스님이 창건한 길상사 개원 법회에 김 추기경이 참석해 축하인사를 하자 스님은 이듬해 명동성당에서 특별강론을 했다. 종교 간 화합을 강조했던 김 추기경은 타 종교를 찾아가 거리낌 없이 절을 했고, 법정 스님은 길상사에 성모 마리아를 닮은 관세음보살상을 모셨다. 안경, 필기구, 책 몇 권, 수단(미사 때 입는 검은 옷), 승복에 불과한 두 어른의 유품은 커다란 감동을 우리에게 던져준다. 올해 세밑이 유독 추운 것은 날씨 때문이 아니라 화합하고 용서하라는 두 어른의 가르침이 무색해졌기 때문이리라.
참여정부에서 청와대 홍보수석을 했던 이백만씨(62)는 물러난 뒤 근 10년간 돈벌이를 못했다. 스스로를 ‘마덕사’라고 불렀다. ‘마누라 덕에 사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그는 백수생활을 정말 알차게 보냈다. 캄보디아 장애인 직업기술학교에 가서 ‘엉클 조’라는 이름으로 헌신적인 자원 봉사활동을 벌였다. 좀 더 차원 높은 ‘사람 사는 세상’을 위해 가톨릭 교리신학원을 졸업했다. 문재인 정부 들어 교황청(바티칸) 대사로 발령이 나자 그의 지인들은 진심에서 우러난 축하의 박수를 보냈다. 눈빛이 해맑은 그를 보면 인생은 스스로 인연을 만들고 그 결과로 살아가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2002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나란히 영입된 이혜훈 의원과 조윤선 전 장관은 악연에 가깝다. 박근혜 정부에서 이혜훈은 야인생활을 한 데 비해 조윤선은 여성가족부 장관, 정무수석, 문체부장관 등 꽃길을 밟는다. 그러나 2016년 총선을 앞두고 벌어진 새누리당 서초갑 경선에서 이혜훈은 불과 13표 차이로 조윤선을 누르는 이변을 연출했다. 국회의원이 된 이혜훈은 박근혜 국정농단과 관련해 열린 국회 청문회에서 마치 한풀이라도 하는 양 매몰차게 조윤선을 몰아붙였다. 이혜훈은 뇌물혐의라는 암초에 걸려 대표직에서 물러났다. 두 사람 모두 재판결과에 따라 정치적 재기를 노릴 수 있다는 점에서 승부는 아직 진행형이다.
인생은 수많은 만남의 연속이다. 만나고 헤어지는 인연만큼 소중한 것이 없다. 어떻게 인연을 쌓느냐에 따라 인생이 달라진다. 세상에는 정해진 운명은 없고, 인연의 원인과 결과만 있을 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씨앗, 즉 원인이 되는 인((因·cause)이 있고, 여기에 변화를 주는 연(緣·occasion)이 작용해 그 결과인 과(果·consequence)가 나온다.
지동설을 주장한 갈릴레이 갈릴레오는 종교재판을 받으면서 소신을 번복하지만, 같은 주장을 한 브루노 신부는 소신을 지키기 위해 화형을 선택한다. 혁명에 성공한 카스트로는 종신 대통령이 되고, 최고 동지인 체 게바라는 영화를 뒤로하고 죽음이 기다리는 혁명전선에 뛰어든다. 조정의 전투명령을 받고도 이순신 장군은 이를 거부해 투옥까지 되지만, 원균은 나가 싸우다 죽는다. 무엇이 이들의 행로를 갈라놓았을까. 동일한 상황에서 다른 길을 선택하는 것은 그 사람의 마음과 주변과의 인연 때문이다.
지난해 광장을 가득 메운 촛불 집회와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탄핵의 씨앗은 세월호 침몰사건에서 뿌려졌다. 초대형 참사에도 안일하게 대응하는 정권을 지켜보고 국민들은 분노했다. 국민이 인(因)이라면 이 인에 맞는 연(緣)이 될 지도자가 중요하다. 문재인 정부 들어 적폐 청산이 한창이다. 이명박 전 대통령까지 거론되는 것을 보면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에 대한 원한이 뼈에 사무친 것 같다. 검찰이 주도하고 있는 적폐 청산은 과거 불법행위에 대한 뒤늦은 수사라고 봐야 한다. 적폐 청산은 국민과 국민을 대리하는 국회의 몫이 되어야 한다. 자칫 정치적인 보복으로 흐르면 또 다른 미래의 보복을 잉태할 뿐이다.
길지도 짧지도 않은 인생을 살아보니 운명과 인연은 인간의 능력으로 예측하기 어렵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믿었던 사람으로부터 뒤통수를 맞는 배신을 당하기도 했고, 별 관심 없던 지인에게 큰 도움을 받기도 했다. 정작 내가 아쉬울 때 누가 나에게 큰 도움을 줄지 아무도 모른다. 누군가와는 아름다운 인연이 되고, 어떤 이와는 뜻하지 않게 악연의 업을 쌓는다.
전직 대통령과 재벌총수들의 사주를 봐줘 유명해진 어느 역술인은 부와 권력을 거머쥔 사람들의 공통점은 남들로부터 인정을 받았고, 여자들에게 원한을 사지 않으며, 돈을 제대로 잘 쓰는 것이라고 말했다. 살아가면서 쌓은 인연을 잘 활용했다는 얘기다.
‘우리는 별들이 갖고 노는 테니스공에 불과하다’는 운명론은 너무 비극적이다. 성공도 실패도 마음을 잘 쓰고, 못 쓴 차이일 뿐 운명이나 팔자가 아니다. 생각이 개인의 운명이며, 국가의 역사를 가른다. 올해 실패했다고 낙담하거나 포기할 일 아니다. 성공한 사람은 성공에 이르는 일을 한 사람이고, 실패한 사람은 그런 일을 하는 데 실패한 사람이다.
꿈은 결코 막을 내리지 않았고, 내려서도 안 된다. 단지 성공이 좀 늦어지고 있을 뿐이다. 태양이 불타고, 시간이 있고, 공간이 있는 한 승부는 아직 진행형이다. 은혜는 바위에 새기고, 원한은 모래 위에 새기라는 말이 있다. 이제 서운한 감정이나 개인적인 원한은 저물어가는 정유년과 함께 놓아주자. 새해엔 새 해가 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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