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위원회가 딜레마를 겪고 있다. 이번 정부 금융분야 최우선 공약인 '장기소액연체자 빚 탕감'이라는 판도라 상자를 열었지만 모럴해저드에 대한 국민들의 비판을 우려한 흔적이 곳곳에서 포착된다.
실제로 금융위는 '신청자에 한해' 그리고 '꼼꼼한 상환 능력 심사'라는 두 가지 전제조건을 내걸었다. '빚을 못 갚는 이들'에 대한 지원과 '성실상환 유인'이라는 갈림길에서 금융위가 혼란을 겪는 모양새다.
최종구 금융위원장은 29일 "(채무면제가 문 정부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일지는) 장담할 수 없다"며 "현재 목표는 일회성으로 내년까지 마무리할 계획이다"고 밝혔다.
최 위원장의 발언에서 알 수 있듯 이번 대책은 모두 '미지수'다. 채무면제 대상자와 지원규모, 심사신청 절차, 장기소액연체 채권 매입 방식 등이 정해지지 않았다. 국민행복기금과 그 외 민간 금융사 등이 보유한 장기소액 연체 채권에 해당하는 채무자가 대략 160만 명에 달한다는 것만 추정했다.
실제로 최 위원장은 "1000만원 이하 10년 이상 장기소액연체자가 국민행복기금과 일반 금융권 통틀어 160만 명 정도라는 것만 근사치로 알 수 있다"며 "신청 규모, 상환 능력 심사 결과에 따라 채무 면제 대상이 어느 정도 될지는 시간이 지나야 알 수 있을 것이다"고 말했다.
정부는 이번 채무면제 대책에서 모럴해저드 비판을 최소화하기 위한 장치를 마련하는 데 주력했다고 밝혔다. '빚을 갚지 않은 사람들'을 최대한 걸러내겠다는 것이다. 상환 능력 심사 후 기준에 부합하더라도 은닉 재산이 발견될 가능성을 무시할 수 없어 3년간 유예기간을 두고 채권소각을 하기로 했다. 은닉 재산이 발견되면 감면 조치가 무효화된다.
또 빚 탕감에 대한 비판적인 여론을 의식해 민간이 보유한 장기연체 채권(76만여명)을 매입하는 데 재정은 절대 투입하지 않기로 했다. 대신 이러한 채권을 매입하기 위한 새로운 신규 기구를 비영리 재단법인 형태로 한시적으로 설치하고 캠코가 운영을 맡는다.
이 기구는 상환 능력이 없는 채무자의 채권을 매입해 소각하므로 수익금이 전혀 발생하지 않는 구조여서 금융권의 출연금으로 재원을 마련키로 했다. 국민행복기금 내 약정채권을 캠코로 넘긴 후 생긴 매각 대금을 금융회사들에 배분하면 그 금액 중 일부를 금융사들이 기부해 민간의 장기소액연체 채권 매입에 사용하는 방식이 유력하다.
이명순 금융위 정책관은 "세금으로 빚을 갚으면 안된다는 여론때문에 재정은 들어가지 않는다"며 "오랫동안 추심 고통에 시달리긴 했지만 채무자 본인이 대출을 받은 것인데 납세자들의 부담이 들어가면 형평성에 문제가 있다고 판단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기본적으로 (기구 운용을) 금융회사의 출연금으로 하는 것은 채권이 부실화되는 데 금융사가 채무자의 상환 능력을 제대로 평가하지 못하고 대출을 해준 책임도 있어서다"고 덧붙였다.
상황이 이렇자 전문가들은 금융위가 정책적 딜레마를 겪고 있다고 진단했다. 김영일 한국개발연구원(KDI)연구위원은 이번 대책에 대해 "연체자의 경제적 재기를 지원하고 연체로 인해 고통을 받은 이들의 부담을 경감시켰다는 취지에서는 바람직하다"면서도 "성실 상환자들이 갖게 되는 박탈감 등 형평성 문제가 불거질 수 있다"고 평가했다.
김 연구위원은 채무자의 부담경감과 도덕적 해이·형평성 이 두 가지 과제 사이에서 금융당국이 어떻게 균형을 맞출 것인지가 향후 과제라고 지적했다.
그는 "100만명이 넘는 장기소액연체자들이 금융·경제활동을 못하는 것은 인적자원 낭비다. 어떻게든 이들을 끌어안아 생산적인 활동을 할 수 있도록 해야한다"며 "동시에 평소 성실하게 빚을 갚은 이들의 성실상환 유인을 떨어뜨리지 않아야 하는데 아무래도 이 부분에서 정책적 딜레마가 발생하는 것으로 보인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