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건물 4층과 5층에 들어가 보면 완전히 다른 세계가 숨겨져 있다. 문 앞에 걸린 ‘寺院居善堂(사원거선당)’이라고 적힌 편액 밑을 통과해 들어가면 ‘신의 세계’가 펼쳐진다.
삼국지의 영웅으로 재신과 무신인 관우, 바다의 항행을 지켜준다는 마조(媽祖), 중생을 위험에서 구제해 준다는 불교의 관세음보살, 재앙을 물리치고 평안을 가져다준다는 호삼태야(胡三太爺), 산육과 육아의 신인 자손낭낭(子孫娘娘), 도교의 신 가운데 가장 권위가 높은 옥황대제(玉皇大帝), 그 다음으로 권위가 높은 삼청노조(三淸老祖), 한 가정을 보호하고 감찰하며 옥황대제에게 가정의 선행과 악행을 보고하는 조왕노야(灶王老爺), 토지를 관장하는 복덕정신(福德正神), 각종 질병을 치료해 주는 약왕(藥王), 토목건축의 행업신(行業神)인 노반사조(魯班師祖) 등 18가지의 각종 신을 모신 작은 사당이 설치돼 있다.
이들 신은 중국의 토테미즘, 민간신앙, 도교, 불교에서 유래된 것이다. 동남아시아와 일본은 대체로 하나의 사원에는 1~2종류의 신을 모시는 것이 일반적인데 이렇게 많은 신을 한 공간에 모신 경우는 매우 드물다. 하나의 사원에 여러 신을 모신 것을 ‘다교일묘(多敎一廟)’, ‘다신혼잡성’, ‘아파트 방식의 묘우’라 부른다.
사원이 세워진 후 이를 기념하여 두 신자가 편액을 보낸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서금명(徐金鳴)이 1907년 거선당에 봉헌한 ‘청화운룡문(靑花雲龍紋)’ 도자기 3점이 남아 있는데, 도자기에 ‘大韓國漢城駱洞 居善堂(대한국 한성 낙동 거선당)’으로 돼 있어 거선당이 낙동(현재의 명동)에 있었다는 것이 증명된다.
거선당은 청조의 한성총영사관에 거선당의 부동산 소유증명을 청구한 문서에 ‘남서 회현방 낙동 기와집 1개소 이 토지와 건물이 청구자의 소유인 것을 증명함, 1908년 3월 29일’로 적혀 있다.
당시의 거선당은 명동의 기와 건축물이었다는 것이 확인된다. 명동의 이 부동산은 화교 정도덕(丁道德), 이보산(李寶山)이 거선당에 증여한 것이었다.
이 기와집 거선당은 한국전쟁의 휴전이 성립된 이듬해인 1954년 헐고 새로운 중국 전통의 사합원(四合院) 양식의 건물을 지었다. 이 건축물은 1982년 헐려 현재의 건물이 들어서기까지 지속됐다. 1983년 지어진 현재의 4층 건물은 몇 번의 수리를 거쳐 지금에 이르고 있다.
중국 명조 때 생긴 선당은 지역의 신상(紳商) 중심으로 조직됐으며, 과부나 불우한 주민을 돕는 자선단체의 역할을 했다.
그런데 선당에는 지역민이 숭상하는 신을 모시고 제사지내는 곳이 많았다. 선당과 종교가 결합하는 배신선당(拜神善堂)인데 거선당도 바로 그런 선당이었던 것이다.
반면, 같은 동북아지역에 위치한 일본화교는 관우를 모신 관제묘(關帝廟)와 마조를 모신 마조묘(媽祖廟)는 있지만 거선당과 같은 선당은 없다.
선당을 연구하는 시가 이치고(志賀市子) 일본 이바라키기독교대학 교수는 “한국에 선당이 존재한다는 것은 매우 흥미롭다”면서 “일본에는 선당이 없는데 어떤 경위로 한국에 선당이 설치됐는지 상당히 관심이 많다”고 말했다.
홍콩과 동남아시아 선당을 연구하는 차이즈샹(蔡志祥) 홍콩중문대 교수는 “중국의 화남지역과 동남아시아에서 많이 볼 수 있는 선당이 서울 한 복판에 있다니 매우 놀랍다”고 전했다.
동남아시아 각지는 차오산(潮汕)지방에서 유행한 송대봉(宋大峰)을 주신으로 한 배신선당이 도처에 설치돼 있다. 태국화교는 보덕선당(報德善堂)을 설치해 태국을 대표하는 자선단체로 발전을 이뤘다.
말레이시아에서 100개의 사원을 가진 덕교(德敎)는 원래 선당에서 출발한 종교단체다. 미국화교도 19세기 말 선당을 설치해 불우하게 이주지에서 사망한 화교의 시신을 고향에 보내는 활동을 전개했다.
거선당은 법사(法師) 혹은 영정(領正)으로 불리는 지도자가 제사를 지내고 조직을 관리했다. 거선당의 법사 가운데 초대로 보이는 류합영(劉合榮)은 1869년 9월 19일 생으로 1945년 5월 15일에 사망, 거선당에 위패가 모셔져 있다. 본명은 해정(海亭).
장(張) 법사는 1911년 6월 16일(음력)에 태어나 1968년 5월 4일(음력)에 사망했는데 그의 출신지는 허베이성(河北省)이었다. 이가성(李可聲) 법사는 1910년 2월 17일(음력)에 태어나 1978년에 사망했으며, 출신지는 산둥(山東)성 원덩(文登)현이었다. 한국화교의 출신지가 산둥성과 허베이성이기 때문에 법사도 이 지역 출신이 많았다.
거선당은 자손낭낭의 탄신일인 음력 3월 20일을 전후로 전국의 화교 다수가 모여 행사를 거행했다. 탄신일의 전날인 19일은 입산(入山), 20일은 정일(正日), 21일은 출산(出山)이라 해서 3일간 거선당 사원에서 경극 공연을 했다. 거선당이 중국 전통문화의 ‘살롱’ 역할을 한 것이다.
또한 거선당은 참가한 화교에게 수면(壽麵, 장수의 국수)을 제공했다. 이 행사는 전국의 화교가 참가하여 성황리에 개최됐기 때문에 미혼 남녀의 맞선의 장소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 행사는 1982년 사합원 건물을 철거한 후 사라졌으며, 현재는 거선당의 임원과 일부 화교가 참가해 제향제배하고 있을 뿐이다.
거선당은 1954년 사합원의 새로운 건축물 낙성 기념식 때 거선당계연주공소(居善堂戒煙酒公所)라는 명칭을 사용했다. 거선당의 명칭이 거선당계연주공소로 바뀐 것이다.
거선당에 보관된 깃발 가운데 한국한성시거선당계연주공소(韓國漢城市居善堂戒煙酒公所)도 이 명칭을 사용하고 있다. ‘계연주공소’는 원래 ‘재리교(在理敎)’라고 하는 민간종교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 명칭은 1983년 행정당국에 등기할 때 ‘거선당계연주공소’가 한국인이 이해하기 어렵다고 해서 현재의 ‘거선당문화회’로 바꿨다고 한다.
거선당 건물 4층에 달마불교회당이 있는데 불교의 달마를 모신 사당이 설치돼 있다. 원래 이 단체의 명칭은 재가리(在家裡)로 비밀결사 단체인 ‘청방(淸幇)’이었다.
이 단체는 중앙 및 지방정부의 힘이 약해 정치·사회적으로 혼란한 중국 사회에서 상호부조를 위한 민간이 자발적으로 만든 단체였다. 재가리 회원의 선후배 관계는 부자 관계로 말해질 정도로 위계질서와 상호부조 관계가 확실했다.
서소문동에 있던 달마불교회당은 해방 이후 명동 2가의 현 거선당으로 향당을 이전했다. 사합원 건물의 한쪽은 거선당, 한쪽은 달마불교회당이 각각 설치됐다. 1983년 새롭게 건축된 현 건물의 4층에 달마불교회 향당이 마련됐다. 1963년 당시 한국 국내 거주 회원은 1200여명에 달할 정도로 상당한 세력을 형성했다.
달마불교회의 조직이 강력한 곳은 서울과 대구였다. 지방의 대구는 연보주(連寶珠)가 노사(老師)로 강력한 네트워크를 형성했다. 국백령(鞠柏嶺) 한성화교협회고문은 “군산에서 거주할 때 부친이 달마불교회 회원이었다”면서 “한국전쟁 때 서울과 인천에서 피난 온 후배 회원이 찾아와 여비도 마련해 주고 장사 밑천도 대주는 등 많은 도움을 받았다”고 밝혔다.
국 고문은 “회원 간에는 독특한 암호가 있어 처음 만나는 사람일지라도 암호로 소통을 하면 무조건 도와줄 만큼 연대의식이 강했다”고 설명했다.
달마불교회의 향당 제일 안쪽에는 ‘달마노조지위(達磨老祖之位)’로 쓰인 신위가 안치돼 있고, 그 뒤에는 달마의 초상화가 걸려 있다. 신위의 옆에는 나무방망이 하나가 걸려 있다.
이 방망이는 회원이 규칙을 어겼을 때 때리던 회초리와 같은 것이었다. 신입회원 입회식 때는 제자로서 지켜야 할 규칙을 말하고 이를 어겼을 때 엄격한 처벌을 받을 것을 서약했다. 싸움을 하거나 선배를 업신여기는 행동을 하면 사부로부터 엄벌을 받았다. 달마불교회는 화교사회의 질서 유지와 상호 협력에 큰 역할을 했지만, 최근 신입 회원이 없어 활동이 많이 위축된 상태다.
◆ 이정희 인천대 중국학술원 교수
일본 교토(京都)대에서 동양사학으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국립인천대 중국학술원 교수, 중국 칭화(淸華)대 화상연구중심의 특별초빙연구원(교수)으로 재직 중이다. 화교사 및 동아시아사를 연구하고 있으며, 저서로는 ‘조선화교와 근대 동아시아’(일본어, 단저)와 ‘근대 인천화교의 사회와 경제’(공저) 등 다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