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영희칼럼] 인간이 잘하는 것, 기계가 잘하는 것 모라베크의 역설

2017-10-26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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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영희칼럼]

 

[사진=장영희 시청자미디어재단 서울센터장·경제학박사]



인간이 잘하는 것, 기계가 잘하는 것
모라베크의 역설

만약 내가 20~30년 늦게 태어났다면 취업 문턱을 넘지 못했을 것이다. 근사한 혹은 변변한 일자리는 꿈도 꾸기 어려웠을지 모른다. 대학에서 공부는 거의 내팽개치고 학생운동의 자장에 있었을 뿐 취업 준비를 아예 한 적이 없다. 그때는 그렇게 해도 일자리를 구하는 것이 가능했다. 이제는 그게 통하지 않을뿐더러 갈수록 강고한 현실이 되고 있다. 온갖 스펙으로 중무장해도 취업 문턱에서 고배를 마시는 젊은이가 넘쳐나고 있다는 것은 이미 10년 전부터 나오는 얘기다. 그런데 청년실업의 암울한 사정이 나아질 여지는 별로 없어 보인다. 아니 청년층만이 아니라 전 연령층에서 인간의 일자리 자체가 빠르게 사라지리라는 예측이 많아지고 있다. 지난해 이후 하루가 멀다 하고 자주 언급되고 있는 이른바 제4차 산업혁명의 도래에 따른 영향이다.
1년 반도 더 지났지만 지금도 충격이 생생하다. 지난해 3월 이세돌 대 알파고 혹은 ‘딥마인드 챌린지 매치’라 불렸던 세기의 바둑 대결이다. 인간과 기계의 대결에서 인간은 졌다. 그후 중국의 커제도 졌고, 그의 눈물을 우리는 봤다. 1946년 세계 최초의 컴퓨터 에니악이 발명된 이후 인공지능은 날로 발전해 왔다. 1997년 IBM의 인공지능 ‘딥 블루’가 세계 체스 챔피언인 가리 카스파로프를 이길 때만 해도 ‘체스는 몰라도’라고 사람들은 생각했다. 그후 인공지능 왓슨이 미국의 퀴즈프로그램에서 역대 우승자를 제치기도 했지만 충격의 강도는 크지 않았다. 하지만 바둑은 달랐다. 바둑은 게임의 전개가 워낙 다양해 인공지능이 쉽게 정복하지 못하는 분야로 여겨왔던 탓이다.
2016년 1월 스위스 다보스에서 열린 세계경제포럼(WEF) 연례회의에서 클라우스 슈밥(Klaus Schwab) 회장은 현재를 ‘제4차 산업혁명’시대로 규정했다. 최초의 산업혁명은 1784년 영국에서 시작해 유럽과 미국으로 퍼져 나갔는데 거의 100년에 걸쳐 일어났다. 1차가 생산과정에서 연장(tool)이 기계(machine)로 대체된 것이 특징이라면, 2차는 전기의 사용과 표준화와 분업화에 따른 대량생산이 가능해진 것이다. 제2차(1879~1950년)도 거의 70년 동안 계속되었는데, 생산시스템의 자동화가 시작된 제3차 역시 1950년대부터 현재까지 70년 가까이 지속되고 있다고 본다. 따라서 4차 산업혁명은 아직 도래하지 않은 사전선언 성격을 띤다. ‘지능화’가 4차 산업혁명을 규정하는 핵심어인데, 사물인터넷(IoT: Internet of Things)과 빅데이터(Big Data), 인공지능(AI: Artificial Intelligence) 등이 핵심기술로 꼽힌다.
제4차 산업혁명은 1단계로 사물인터넷의 진화와 디지털화에 따른 산업구조의 초연결성이 확장되고, 다음 단계로 인공지능(AI)과 빅데이터의 협력에 의한 산업구조의 초지능화 현상으로 이어진다. 마지막으로 초연결성과 초지능성의 연계로 사이버시스템과 물리시스템이 연결되는 사이버물리시스템(CPS)으로의 전환이 이루어진다. 이것은 무엇인가? 우리가 흔히 비트라 칭하는 사이버세계와 아톰으로 불리는 현실세계가 하나로 통합된다는 뜻 아닌가.
이런 산업구조의 변화는 필연적으로 노동의 질과 양을 모두 변화시키고 삶 전체에 총체적 변화를 가져올 것이다. 모든 면에서 기계가 인간을 대신해 노동한다는 것은 두 얼굴로 다가올 수밖에 없다. 생산성 향상 등 경제효율을 극대화하고 안락한 삶을 제공하겠지만, 역시 최대 문제는 일자리 대체로 귀착할 것이다. 인간에게 기계는 넘사벽 아닌가. 반복노동과 비반복노동은 물론 알파고에서 보듯이 지식노동조차도 기계 차지가 될 공산이 높다.
노동현장에서 제거된 인간은 가난해질 수밖에 없다. 기업이 로봇을 통해 아무리 좋은 제품을 싸게 생산해도 사 줄 사람이 없어진다. 소비능력이 없으니 경제가 성장할 수 없고 그럼 자본주의는 멈출 수밖에 없다. 최근 들어 기계가 벌어들인 이윤과 소득의 상당 부분을 사람에게 되돌려주고, 남는 시간에 여가를 즐기고 인문·철학적 사고와 문화예술 활동을 하면서 삶의 질을 높이자는 이른바 기본소득과 로봇세 논의가 제기되는 것도 이런 역기능 해소책의 일환으로 보인다.
기계의 일자리 역습에 대해 반론도 만만치 않다. 제1차 때인 1811∼1817년 영국의 중부·북부 직물 공업지대에서 일어났던 '러다이트 운동', 즉 '기계 파괴 운동' 같은 사람과 기계의 충돌도 일어났지만 지난 250년간 기술 혁신의 순간마다 고도화된 기술과 기계가 사람의 일자리를 위협하기보다는 새로운 분야 일자리를 창출하는 결과를 가져왔다는 것이다.
기계와 인공지능이 우리 삶 속에 들어오고 기계와 사람 혹은 기계와 기계가 소통하는 이른바 초연결 시대는 불원간 닥칠 것이다. 알파고의 아버지인 데미스 허사비스 구글 딥마인드 CEO는 이세돌과 알파고의 대국이 끝난 후 이런 말을 했다. “우리가 배운 것은 알파고가 인간이 찾아내지 못한 수를 보여주기도 하고 인간이 알파고가 계산해낼 수 없었던 새로운 수를 발견해내는 것, 즉 인간과 기계의 공존 및 공영 가능성이다.”
인간과 기계의 공존 시대. 미국의 로봇 공학자인 한스 모라베크가 만든 ‘모라베크 역설(Moravec’s Paradox)’이 떠오른다. 인간에게 쉬운 것은 컴퓨터에게 어렵고, 인간에게 어려운 것은 컴퓨터에게 쉽다는 역설이다. 계산과 추론 같은 추상적·논리적 사고는 컴퓨터가 잘한다. 반면 감정과 맥락을 읽는 능력은 인간에게는 쉽지만 컴퓨터에게는 매우 어렵다. 가령 사람이 배우기 어려운 체스나 바둑은 인공지능이 따라할 수 있지만, 로봇은 바둑알을 바둑판에 내려놓기 힘들어하고 자연스럽게 걷거나 뛰지 못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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