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루즈선 발주 시장이 2000년대 들어 최대 호황기로 접어들었으나 한 치 앞을 내다보지 못한 채권단의 STX유럽 매각 추진으로 한국은 잔칫상에 초대받지 못한 채 바라만 보는 구경꾼으로 전락했다.
2015년부터 서서히 크루즈선 시장이 회복되고 있다는 신호가 포착되었으나 정부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매각에만 집중, 크루즈선 산업 진출의 마지막 기회를 스스로 포기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기자재 업체들의 크루즈선 건조 시장 진출을 지원한다면서 크루즈선을 건조하는 조선소를 팔아버리는 정부의 엇박자 정책에 기업들만 피해를 입고 있다.
24일 관련 업계에 따르면, 크루즈선 산업은 올해 들어 호황의 절정을 구가하고 있다.
이러한 호황은 STX유럽이 매각되면서 본격화됐다.
2014년 마이어 베르프트에 매각되기 직전 수주잔량이 1척(10만9000CGT)에 불과했던 STX핀란드는 사명을 마이어 투르크로 바꾼 그해 8월 수주잔량이 3척(32만4000CGT)으로 증가해 2015년 7월에는 7척(80만CGT)까지 늘어났다. 이후 5척까지 줄었던 마이어 투르크는 올해 들어 추가 수주에 성공하더니 3월에는 7척을 수주하며 CGT 기준으로 처음으로 100만CGT를 넘어섰고 두 달 후 1척을 추가 수주했다.
STX프랑스도 수주 상승세를 이어가고 있다. 2014년 11월까지 수주잔량이 2척(37만8000CGT)까지 떨어졌던 STX프랑스는 한 달 후 4척(68만8000CGT), 2016년 9월에 7척(106만8000CGT)에서 올해 8월까지 11척(196만6000CGT)으로 늘어났다.
STX유럽 아래서 한솥밥을 먹었던 두 조선소는 현재 2020년 중반대까지 조업 물량을 확보해 고용 확대 및 신사업 투자 등을 적극 추진하고 있다. 덕분에 글로벌 조선시장 불황에도 불구하고 프랑스와 핀란드 조선산업은 그 어느 때보다 활기에 가득차 있다. 현대중공업·대우조선해양·삼성중공업 등 글로벌 조선 빅3가 일감 부족으로 희망퇴직 및 직원들의 무급 휴가를 단행하는 한국의 사정과 상반되는 장면이다.
◆STX, “채권단에 크루즈선 사업 매각 신중 제안했다”
STX프랑스와 마이어 투르크의 선전을 바라보는 STX그룹 출신 인사들의 심정은 착잡하다.
2000년대 중반 당시 크루즈선 시황은 상선 건조 시장의 성장세에 비해 바닥세였으나 기존 수요가 있고, 일감도 꾸준히 확보할 수 있어 조선소 운영에는 큰 문제가 없었다. STX그룹이 아커야즈 인수를 결정한 것도 회사의 잠재력에 비해 가치가 낮아 적은 인수비용으로 단숨에 크루즈선 사업에 진입할 수 있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다만, 예기치 못한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발발로 크루즈선 최대 고객이었던 유럽과 미국의 크루즈선 여객 수요가 급감하면서 선사들도 수주를 중단했다. 이에 STX핀란드는 2010년 10월부터 2011년 9월까지 1년간 일감이 없어 조업이 사실상 중단되기도 했다.
2013년 5월 STX그룹이 채권단에 구조조정을 요청했을 당시, 두 조선소의 수주잔량은 불과 3척에 불과했을 만큼 돈을 쏟아부어도 좀처럼 회생의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결국 채권단에 경영권이 넘어가면서 매각 수순에 들어갔다.
이때, STX유럽에 파견 근무를 했던 STX 출신 인사들은 채권단에 직·간접적으로 조선소 매각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는 제안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수주영업 담당 직원들로부터 곧 크루즈선 발주가 재개될 것이며, 회사도 정상화될 수 있다는 소식을 접했기 때문이다.
전직 STX 임원은 “금융위기 직후 얼어붙었던 유럽과 미국의 경기가 되살아나고, 각국의 경제을 떠받쳤던 베이비부머들의 은퇴 시기가 맞물리면서 크루즈 관광산업이 반등하기 시작, 보류했던 선사들의 노후 선박 교체가 본격화됐다”고 설명했다.
그는 “여기에 경제성장으로 주머니 사정이 넉넉해진 중국을 비롯한 동남아시아권 국가 관광객들이 크루즈 여행에 눈을 돌리기 시작하면서 이 시장에 투입할 새 선박 발주 수요도 점차 커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 관계자는 “3년만 채권단이 버텨줬으면 더 큰 열매를 따 먹을 수 있었다. STX의 실수도 크지만 우리의 의견을 믿고 기다려줬으면 좋았을 텐데”라면서 “당시 우리의 목소리가 힘을 얻지 못했으나 지금 그 의견이 현실이 됐다. 우리 기자재 기업들이 STX유럽을 통해 크루즈선 산업에 들어갈 가능성이 높았고, 매각을 했더라도 더 높은 가격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 더 안타깝다”고 전했다.
◆크루즈선 양강 체제 심화··· 한국 사실상 좌절
글로벌 크루즈선 산업은 마이어 베르프트와 핀칸티에리, STX유럽 등 3강 체제를 유지해왔다. 이 가운데에서도 STX유럽은 초대형 크루즈선 부문에선 비교 우위를 점해왔다.
조선·해양 전문지인 ‘마린 인사이트’가 선정한 ‘2017년 세계 10대 초대형·럭셔리 크루즈선’ 순위에 STX유럽이 건조한 ‘하모니 오브 더 시즈’와 ‘얼루어 오브 더 시즈’, ‘오아시스 오브 더 시즈’ 등이 1~3위를 휩쓰는 등 총 5척이 이름을 올렸다.
STX유럽이 초대형 크루즈선에서 두각을 나타낼 수 있었던 것은 아커야즈 시절부터 파트너였던 세계 2대 크루즈선사인 미국의 로열 캐리비언과 MCS 크루즈, 노르웨이안 크루즈 라인 등 핵심 고객사의 꾸준한 발주에서 비롯됐다. 특히 로열 캐리비언은 STX유럽이 수주 부진으로 고전할 때에도 초대형 크루즈선을 발주하며 회사를 지원했다.
상선 부문과 마찬가지로 크루즈선 부문 역시 발주처와의 관계가 매우 중요하다. STX유럽뿐만 아니라 핀칸티에리는 세계 최대 크루즈 선사인 카니발, 마이어 베르프트는 스타크루즈 등과 지속적인 파트너십을 유지해 오며 정상급 크루즈선 조선사로 발돋움할 수 있었다. 전직 STX조선해양 임원은 “아커야즈를 높은 가격에 인수한 이유도 조선소뿐만 아니라 확실한 우군, 즉 발주처를 확보할 수 있다는 점 때문이었다”면서 “이들이 없다면 아무리 기술이 뛰어나도 단기간에 크루즈선 시장에 들어갈 수 없다”고 설명했다.
STX핀란드는 마이어 베르프트에 매각됐고, STX프랑스는 핀칸티에티가 인수하면서 STX유럽은 사라진다. 두 조선소를 나눠 가진 양사의 크루즈선 시장 독점체제는 더욱 심화될 전망이다.
조선산업 관계자는 “두 기업들은 크루즈 최대 시장으로 떠오르고 있는 중국시장 진출도 구체화하고 있다. 상선 부문에서 중국과의 경쟁이 치열해지고 있는 상황에서 크루즈선 사업은 중국에 밀릴 게 분명하다. 그래서 STX유럽의 부재는 더욱 뼈아프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