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골프의 추세는 장타자다. 롱 아이언을 잡지 않고도 그린을 공략할 수 있는 확률이 높아진다. 미국의 장타자 렉시 톰슨이 시즌 그린 적중률 1위를 달리고 있는 숨은 비결이기도 하다. 다만 티샷의 정확도가 동반될 때 통하는 말이다. 그래서 페어웨이 안착률이 중요하다.
지난 3일 막을 내린 한국여자프로골프(KLPGA) 투어 메이저 대회 한화 클래식은 ‘대세’인 장타자가 ‘대수’가 아니었다. 긴 러프로 새 단장해 매서운 칼날을 세운 제이드팰리스 골프클럽의 코스는 내로라하는 장타자들이 결국 꼬리를 내렸다.
이번 대회 10번홀(파4)은 18개 홀 가운데 전장이 가장 짧은 330야드 내리막 코스다. 장타자라면 원온을 도전해 이글을 노릴 수 있는 홀이다. 프로 데뷔전을 치른 장타자 최혜진(18)도 “드라이버가 가장 잘 맞았을 때 원온이 가능한 홀”이라고 자신감을 보였다. 실제로 최혜진은 4라운드에서 원온에는 실패했지만, 그린 주변까지 티샷을 보내 칩샷으로 이글을 잡았다. 미국의 대표적인 장타자 제시카 코다도 원온으로 이글 기회를 만들어 손쉽게 버디를 낚기도 했다.
이번 코스는 프로 대회가 처음 개최된 곳이다. 한화 측에서는 메이저 대회의 난이도를 높이기 위해 페어웨이를 좁히고 러프를 길게 길러 난이도를 높이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일단 공이 러프에 빠지면 잘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티샷이 페어웨이에 안착하지 않으면 대부분의 선수들이 고전을 면치 못하고 보기 이상을 범하기 일쑤였다. 일단 깊은 러프에 들어가면 그린을 포기하고 레이업부터 고민해야 할 지경이었다.
이번 코스를 처음 경험한 코다는 “특히 어려운 것은 러프에 들어가면 정말 어려운 샷을 해야 한다. 페어웨이를 벗어나면 A컷도 없이 바로 B컷으로 이어져 샷이 어려울 수밖에 없다”고 했고, 고진영(22)도 “페어웨이와 러프가 확연하게 차이나는 코스라서 파만 해도 감지덕지라고 생가할 정도”라며 “페어웨이를 지키는 것이 가장 중요한 코스”라고 혀를 내둘렀다.
또 초청 선수로 출전한 전 세계랭킹 1위 아리야 쭈타누깐(태국)도 최대 강점인 장타력을 뽐내지 못하고 망신만 당했다. 쭈타누깐은 1~2라운드 무려 19오버파를 적어내 컷 탈락의 수모를 당했다. 쭈타누깐의 페어웨이 안착률은 50%에도 미치지 못한 46.40%로 최하위권이었다.
이번 대회에서 생애 첫 메이저 대회 우승을 차지한 오지현(21)을 포함해 김지현2(26), 고진영 등 상위 3위권 선수들은 모두 정확한 ‘컴퓨터 샷'을 구사했다.
오지현은 올 시즌 드라이브 비거리 249.05야드로 27번째로 멀리 보내는 장타자에 속하긴 하지만, 무리하지 않고 철저하게 코스 매니지먼트를 지키며 경기에 임했다. 이번 대회에서는 드라이버로 평균 245야드 정도를 보내 참가 선수 중 21번째로 멀리 보냈다. 대신 페어웨이 안착률 80.40%(11위)로 시즌 평균 74.19%(53위)보다 6% 이상 높였다.
김지현과 고진영은 이번 코스의 준비된 우승 후보자들이었다. 고진영은 시즌 페어웨이 안착률 85.08%로 1위, 김지현이 83.57%로 2위에 자리하고 있는 가장 정확한 선수들이다. 이번 대회에서도 둘은 평균 드라이브 비거리 부문에서는 60위권 밖으로 밀렸지만, 페어웨이 안착률은 고진영이 2위(91.10%), 김지현이 3위(87.50%)를 기록했다.
오지현은 “작년보다 드라이브 비거리도 높아졌지만, 티샷 정확도가 많이 높아진 것이 이번 대회 우승에 큰 도움이 된 것 같다”며 “아이언샷도 탄도가 높아져 (딱딱한 그린의) 코스를 공략하는데 유리했다”고 우승 비결을 전했다.
프로 선수들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한 파워 히터는 달콤한 유혹이다. 하지만 자칫 잘못하면 빛 좋은 개살구일 뿐이다. 결국 난이도 높은 코스에서 우승을 가르는 결정적 승부의 열쇠는 정확한 ‘컴퓨터 샷’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