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영걸칼럼] “최명길을 긍정하오”

2017-08-24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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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윤영걸-초빙논설위원]


“최명길을 긍정하오.”

병자호란을 그린 소설 ‘남한산성’에서는 춤추는 장면이 두 번 나온다. 포위된 남한산성에서 인조가 명 황제에게 제사를 지낸다며 춤을 추는 장면과 왕이 청나라 황제에게 항복을 하며 세 번 무릎을 꿇고 아홉 번 땅에 머리를 부딪칠 때 기생이 춤을 춘다. 을씨년스럽고 처연하다.
청 군대가 국경을 넘은 지 불과 닷새 만에 한양이 함락되자 강화도로 가던 피란길을 돌려 남한산성으로 향한 인조는 반쯤 넋이 나갔다. 청 황제는 궁금했다. 도대체 싸울 능력도, 의지도 없이 성 안에 틀어박혀 굶주리며 버티는 모습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의 가장 큰 걱정거리는 조선왕과 대신들의 집단 자살이었다. 포위된 성 안에서 조선의 대신들은 주전파(척화)와 주화파(화친)로 나뉘어 적이 아니라 내부에서 목숨 걸고 싸웠다. 역사는 끝까지 성에 남아 싸우자는 김상헌을 기개 굳은 선비로 묘사하고, 협상하자는 최명길을 변절자로 폄훼한다.
‘남한산성’ 100쇄 기념 특별판에서 김훈 작가는 김대중(DJ) 전 대통령과의 KTX 내 조우를 기억한다. 전남 여수에 들렀다 상경하는 작가를 본 DJ가 불렀다. 그는 김 작가에게 김상헌(주전파)과 최명길(주화파)을 어떻게 보느냐고 묻더니 혼자말로 또렷이 대답했다고 한다. "난 최명길을 긍정하오."
문재인 대통령은 얼마 전 DJ 8주기 추도식에서 “김대중의 길을 따라 남북이 다시 만나고 희망이 열릴 것”이라고 말했다. 천국의 DJ는 자신의 햇볕정책을 금과옥조처럼 따르겠다는 문 대통령의 이 말에 오히려 불편해할지 모르겠다. DJ라면 햇볕정책을 진즉 포기하지 않았을까. 1994년 5월 미국 내셔널 프레스 클럽 오찬 연설에서 DJ는 햇볕정책을 반신반의하는 미국을 향해 "내가 말하는 것은 우리가 북한을 믿어야 한다는 것이 아니고 단지 북한의 진정한 의도를 시험해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햇볕정책은 절대불변의 신앙이 아니고 여의치 않으면 다른 방안을 찾아보자는 내용의 연설이었다. 그가 강조한 햇볕정책의 세 가지 이유는 첫째, 배고픈 사람에게 배를 채워줘야 한다. 둘째, 북한의 핵무기는 미국과의 대화용이다. 셋째, 일본의 핵무장 도미노를 두려워하는 중국이 북한 핵을 절대 용인하지 않을 것이라는 가정에서 출발했다. 결과적으로 중국을 오판했고, 북한에 속았다. 실용적이고 명철한 DJ라면 한번 속지 두 번은 아니다.
알고 보면 DJ만큼 현실주의자도 없다. ‘서생적 문제의식과 상인적 현실감각’ 이라는 말을 즐겨 한 지도자였다. 남북한 ’힘의 균형’을 입버릇처럼 강조했던 DJ라면 절치부심하며 북한의 기만술을 응징했을 게다. 사드에 이어 방어용 미사일 배치를 서둘렀을 가능성이 높다. 한 걸음 나아가 능란한 화술과 논리로 미국을 설득해 핵무기를 실은 미 잠수함을 동해에 배치하는 현실적인 방안을 모색했을 것이다. 주도면밀한 그는 북한 핵 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위한 유일한 해법은 김정은 정권교체라는 점을 깨닫고 북한 주민에 대한 문화콘텐츠 확산에도 적극 나섰을 것으로 생각된다.
북한이 스스로 핵을 버릴 가능성은 제로에 가깝다. 이미 ICBM(대륙간 탄도미사일)을 활용한 공포전략으로 미국을 흔들어 한국을 포기하게 하려는 노림수를 분명히 드러내고 있다. 북‧미 접촉이 이루어지면(벌써 진행 중인지도 모른다) 한·미 군사훈련 중단에 이어 주한미군 철수를 줄기차게 요구하는 수순이다. 이번 을지훈련에 참가한 미군 병력을 축소한 것을 보면 조짐이 심상치 않다. 미국이라는 버팀목까지 사라지면 핵무기가 없는 한국은 공포심에 사로잡혀 스스로 굴복할 것으로 북한은 기대하고 있다. 제2의 베트남이 북한의 목표다. 미국의 방어선에서 한국을 제외하는 내용의 애치슨라인은 6·25전쟁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북한 핵실험이 처음 실시된 2006년 이후 평화라는 이름의 신기루만 좇다 이제 외통수에 몰렸다. 1991년까지는 북한에 핵이 없고 한국에 핵이 있었는데 26년 만에 상황이 역전돼 북한에 핵이 있고 한국에 핵이 없게 됐다. 핵동결이 북핵 해결의 입구라는 시각도 대단히 위험한 발상이다. 북한이 이미 남쪽을 공격하기에 충분한 핵능력을 갖췄기 때문에 우리 스스로 올가미에 갇힐 수 있다.
나약하고 허세에 찬 우리 지도자의 모습은 380여년 전 남한산성 데자뷔를 보는 것 같다. 1636년 12월 청나라가 압록강을 건너 공격했을 때 비상봉화가 타올랐지만 조정은 “설마 이 추운 겨울에 공격하겠는가”라며 애써 무시했다. 그리고 남한산성에서 47일을 버티다 삼전도에서 무릎을 꿇었다. 미국과 손을 잡고 북한 핵과 싸워야 하는데 거꾸로 북한에 러브콜을 보낸다. 안보협력자인 미국한테 "한국에서는 군사행동을 할 생각을 감히 하지 말라"고 경고한다. 일부에서는 주한 미국 대사관 앞에서 사드 배치와 한·미 군사훈련 반대, 주한미군 철수를 주장하며 시위를 벌이고 있다. 북의 김정은은 정전 64년 만에 남북관계에서 주도권을 잡았다며 콧노래를 부를 듯하다.
우리는 아직 남한산성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죽더라도 싸우다 죽자는 김상헌의 충절은 높이 평가받아야 하지만 남한산성에 갇혀 제대로 무기도 없이 청나라를 대적한다는 것은 만용과 다름없다. 차라리 역적이라는 비난을 받으면서 단신으로 청나라 진지를 찾은 최명길의 ‘상인적인 현실감각’이 재평가를 받아야 한다. 허풍과 선의(善意)로는 평화를 지킬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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