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 부처 산하 A공공기관 기관장은 요즘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 정권이 바뀌고 새로운 지침이 하루에도 몇 건씩 내려오는 상황에서 내년 예산확보도 수월하지 않기 때문이다.
A공공기관은 내년에 신축건물 건립을 핵심 사업으로 잡고 있다. 미래 성장동력을 창출하기 위한 숙원 사업 중 하나다. 해당 부처는 이미 신축건물 건립의 타당성에 공감대가 형성됐다. 올해 초만 해도 이 사업은 무난하게 예산이 배정될 것이라는 기대감이 컸다.
그런데 5월 조기대선 이후, 기류가 급격히 나빠졌다. 새 정부가 출범하며 모든 정책을 ‘일자리’에 귀결시키면서 예산 편성에도 변화가 생긴 것이다.
기획재정부는 문재인 대통령 기조에 따라 내년도 예산안의 대부분을 일자리에 집중시킨다는 내부 방침을 세웠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공공기관들의 외연확대 사업이 줄어들 수밖에 없는 모양새다.
A공공기관 기관장은 “기재부가 일자리에 집중하다 보니 건물 증축이나 사회간접자본(SOC), 연구·개발(R&D) 등 비교적 관심 밖의 분야를 축소하려는 분위기”라며 “애초에 예산 지침이 이런 방향이라면 어느 정도 수긍하겠지만, 내년도 예산편성이 얼마 남지 않은 상황에서 예산을 줄 수 없다고 하니 당황스럽다”고 토로했다.
다른 부처의 B공공기관도 상황은 마찬가지다. R&D가 핵심 업무인 이 기관은 올해 예산도 힘들게 따왔다. 그런데 정부가 매년 R&D 예산을 줄이는 추세다. 내년 예산에서 R&D 사업은 아예 관심 밖으로 밀렸다.
B공공기관 운영실장은 “지난해 예산배정 작업 때는 매일 정부세종청사로 출근했다. 기재부 예산실은 사무관도 만나주질 않았다. 화장실이나 점심시간에 움직일 때 몇 분 얼굴 보고 얘기하면서 사업의 필요성을 설명해야 했다”며 “올해는 이런 방법도 통하지 않는다. 일찌감치 ‘일자리’에 상당수 예산이 배정됐다며 방문해도 소용없다는 통보를 받았다”고 말했다.
이들 기관뿐만 아니다. 주로 ‘○○연구원’, ‘○○진흥원’, ‘○○공단’ 등 일자리와 무관한 공공기관들이 내년 예산 배정에 불안감을 보이고 있다.
기재부도 공공기관의 처지를 생각하면 난감하다. 일부는 사업 타당성이나 비전도 좋다. 그런데 섣불리 결정을 할 수 없다.
내부적으로 ‘불필요한 예산은 전부 줄여라’는 비공식적 지침이 하달된 상태다. 당장 줄일 수 있는 부분은 일자리와 연관성이 없는 건물 신축이나 연구개발 사업이 전부다.
정부 한 관계자는 “부처 차원에서도 공공기관의 사업성이 좋기 때문에 내년 부처 핵심과제로 꼽을 정도인데, 기재부의 기준에 밀리고 있는 것이 안타깝다”며 “그렇다고 모든 부처가 일자리와 4차 산업 등에 매달릴 수 없지 않은가”라고 꼬집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