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일의 비바 록(ROK)] 당장의 전쟁위기는 넘기더라도…

[사진=김현일 논설위원]

말뿐인 평화는 굴종일 뿐-천고마비(天高馬肥) 의미 되새길 때
핵·미사일 결코 포기 않을 북한 직시해야
‘폭탄 돌리기’식 면피 급급했던 역대 정부 모두 책임
월남 패망은 한갓 지나간 역사가 아니다

유난히 무더웠던 올여름이 지나가며 가장 많이 등장하는 단어 중 하나가 '천고마비(天高馬肥)'입니다. 좋은 날씨와 풍요의 계절 가을의 대명사로 자리한 지 오래인 이 말은 성당(盛唐)의 대시인이자 두보(杜甫)의 할아버지인 두심언(杜審言) 시의 한 구절, '추고새마비(秋高塞馬肥)'에서 비롯했다지요.

관련기사

• 이방카 국빈 대우한다고 달라질까
• 북한 비핵화 가능하다고? 적화통일 외치는 북한 설득한다는 데...

그러나 낭만과 여유가 넘치는 천고마비와는 다른, 긴장과 우려가 가득 담긴 유래가 있습니다. 호시절을 구가하는 것과는 정반대의 상황을 가리킨다는 얘기지요. 중국 은(殷)나라 때 흉노족(匈奴族)의 침입과 연관이 있습니다. 중국 북방에 출몰한 흉노는 2000여년간 중국 역대 왕조와 백성들에게 공포의 대상이었습니다. 척박한 초원에서 유목 생활을 하는 흉노는 겨울을 앞두고 중국 변방을 휩쓸며 약탈을 자행했습니다. 넓은 초원에서 싱싱한 풀을 뜯으며 힘을 비축한 말들은 흉노의 기동력 원천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늘은 높고 말이 살찌는’ 때는 위기와 경계의식이 잔뜩 배어 있는 것이지요.

지난 5개월 동안 우리는 한반도 위기설, 아니 전쟁설 속에 살아왔고 지금 이 시간 진행형입니다. 선제타격이니 보복공격이니 하는 끔찍한 단어가 일상 뉴스어로 난무하는 등 개전(開戰)이 임박했다고 여겨도 무리가 아닐 정도입니다. 미국 트럼프 대통령이 '화염과 분노(fire & fury)' 경고를 내보낸 바로 다음 날 북한 전략군사령관이라는 자가 ‘대륙간탄도미사일을 동원한 괌 타격’으로 응수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미국 언론들은 앞다퉈 미군의 전쟁 시나리오를 대대적으로 보도하고 있습니다. THADD, ICBM, SLBM, B-1B, B-2 등 온갖 전략무기가 지면을 장식한 지 오래입니다. 올 초까지만 해도 북한 핵·미사일로 통칭하면 대충 통했지만 이제는 노동·무수단과 화성14, 화성12, 북극성3을 구분해야 사태 파악이나마 가능한, 으스스한 때입니다.

세계가 한반도를 일촉즉발의 화약고로 단정하고 주시하지만 남한은 마냥 태평입니다. 속내가 어찌 편할까만, 그렇게 비친다는 말입니다. 수십년 동안 거듭됐기에 매번 민감하게 반응했다면 배겨나지 못했을 터이고, 그래서 면역이 됐고 불감증이 배었다는 지적도 없지 않습니다만 그건 아닐 겁니다. 지난 몇 개월간 진행된 심각성이 남북 분단 이후 70년 동안의 그것과는 양상이 전혀 다름은 대개들 짐작합니다. 그저 그래봤자 묘책도 없으니까 내색을 자제할 뿐일지 모르지요.

그렇습니다. 정부도, 전문가들도 묘책을 알지도, 찾지도 못합니다. 하기야 뾰족한 묘책 자체가 있을 리 없으니 당연한 노릇입니다. 북한의 무모와 발호를 탓하기에 앞서 우리의 오판·과실도 큽니다. 정말 딱합니다. 생존이 걸린 상황에서 한숨이나 쉬고 딴전이나 피우는 지도자들을 바라봐야 하는 우리 스스로가 정말 한심합니다.

초등학생도 아는 천고마비를 새삼 꺼낸 까닭도 그래서입니다. 오늘 우리의 천고마비는 청명한 날씨와 결실이 아니라 위기의 천고마비입니다. 묘책이 없더라도 마냥 뭉개고 앉아 있을 게 아니라 차선책, 차차선책이라도 강구해야 합니다. 그리고 궁여지책이나마 이뤄지도록 뜻과 힘을 모으는 게 온당한 수순일 겁니다.

하지만 실상은 전혀 아닙니다. 초현대식 흉기를 휘두르며 전쟁을 외치는 상대에게 평화나 되뇌고 있습니다. 유일하게 믿는 게 핵과 미사일인 북한더러 그걸 내려놓으면 대화하고 경협을 하겠다는 게 고작입니다. 자립·자존은 뻔질나게 외치면서 미국과 북한이 뉴욕에서 수개월간 비밀협상을 하고 있으니 기다려보자는 여당 대변인의 논평은 할 말을 잊게 만듭니다. 자기 생존이 걸린 문제에서 겉도는 처지가 무엇인지조차 감지하지 못하니 뭐라 해야 하나요. 전쟁 불사를 각오해야 전쟁을 피할 수 있다는 평화의 기본도 모르고··· 누군들 파국을 넘어 절멸을 내포한 전쟁을 원하겠습니까. 나라를 통째로 북한에 갖다 바치자는 게 아니라면 본질을 직시해야 합니다.

게다가 이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국론은 철저히 분열돼 있습니다. 보수 진영은 때 만났다며 정부의 안보무능을 질타하고, 여권은 "느그들 때는 뭘 잘했느냐"고 치받습니다. ‘8·15범국민평화운동추진위’라는 세력은 미국·일본 대사관을 포위하는 시위를 벌이겠다고 나서고 이에 태극기부대가 대응시위를 벌이는 '장관(壯觀)'을 연출 중입니다.

진보 쪽에선 ‘1994년 영변 핵시설 포격을 극구 반대한 게 김영삼 정부 아니냐’고 공박합니다. 이에 보수 쪽은 ‘북한은 핵을 개발할 의사, 능력도 없다. 내가 책임진다’, ‘자위용 아닌가. 통일되면 (핵무기도) 우리의 것이 될 수 있다’ 운운하며 대북지원에 열심이던 김대중·노무현 정부 시대를 떠올리며 반박합니다.

보수건 진보 정권이건 누구를 나무랄 자격이 없습니다. 위중하게 만든 정도 차이는 있을지언정 ‘폭탄 돌리기’ 게임 식으로 사태를 악화시키기는 매한가지였습니다. 북한이 핵실험을 하면 소형화가 안 됐느니, 미사일을 쏘면 사거리가 짧으니 어떠니 하며 철부지 같은 소리나 지껄였던 그들입니다. 시간이 지나면 실전배치가 빤함에도 황당한 짓거리를 반복했습니다. 이를 방조한 언론·종교·문화 등 각계 지도자라는 이들은 공범입니다. 1975년 월남 패망이 떠오른다는 원로들의 우려가 우연이 아닌 즈음입니다. ‘월맹이 주도한 통일 베트남의 오늘에 무슨 문제가 있냐’고 반문하면 할 말이 없지만 말입니다.

미국과 북한 최고지도자가 상상을 초월하는 ‘말폭탄’을 주고받으면서 한때 전쟁위기가 최고조에 이르기도 했으나 이젠 다소 진정되는 분위기입니다. 시진핑 중국 주석이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통화한 뒤 취한 북한 철강·석탄·해산물 등의 금수조치도 사태를 누그러뜨리는 데 한몫했습니다. 당장의 개전 위험은 일단 사라졌다는 말이지요.

문제는 8월 전쟁설이 지나가더라도 위기가 상존한다는 겁니다. 이미 한국의 취약과 분열상을 꿰고 있는 북한은 기고만장해 무슨 일이든지 벌일 겁니다. 북한은 제2연평해전(2002년) 때 전사한 장병 조문마저 삼가는 등 저간의 한국 정부 행태들을 또렷이 기억합니다. 그런데 20기 이상(추정)의 핵폭탄과 1000기의 각종 미사일을 포함, 과거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화력을 증강한 북한입니다.

정신 차려야죠. 이쪽 저쪽 눈치나 보며 면피나 하려 들면 큰일 납니다. Viva ROK! 결실과 각성·대비 모두를 아우르는 천고마비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