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세와 지지율] 上. 참여정부-공론화 없는 종부세 강행 조세저항 부메랑, 국정주도권 휘청

2017-08-03 0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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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김효곤 기자 hyogoncap@]


“이 세상에 확실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없다. 죽음과 세금 빼고는.”(In this world nothing can be said to be certain, except death and taxes). 미국 건국 주역의 한 명인 벤저민 프랭클린(과학자·언론인·정치인)의 말이다. 먹고사는 문제와 직결한 ‘세금’은 서민·중산층에 가장 민감한 이슈다. ‘민주 대 반(反) 민주’를 능가하는 가장 파괴력 있는 선거 프레임이다.  ‘세금의 정치학’에는 증세·감세의 당위론은 물론, 현실 가능한 목표 실현을 위한 전략·전술 등 고차 방정식이 숨어 있다. 문재인 정부의 '부자 증세'가 뜨거운 이슈다. 총 3회에 걸쳐 노무현·이명박·박근혜 정부 당시 상황을 조명, 세금과 조세 저항의 현대사를 돌이켜본다. <편집자 주>

증세의 당위론과 현실론이 강하게 충돌한 시기는 참여정부 때다. 진보정당이 전무했던 2004년 전까지만 해도 증세·감세 논쟁은 국내총생산(GDP) 성장 등 거시경제에 가려져 후순위로 밀리기 일쑤였다. 하지만 ‘탄핵 역풍’ 속에서 2004년 치러진 17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민주노동당이 진보정당 사상 첫 원내에 진입하면서 세금 논쟁에 불이 붙었다.
노무현 정부가 2003년 9월 1일 신설한 종합부동산세(종부세)가 대표적이다. 2005년 1월 1일 국회 본회의 문턱을 넘은 종부세는 2007년 서울행정법원 취소소송에서 원고 패소 판결을 거쳐 이듬해 11월 13일 헌법재판소에서 세대별 합산 규정 위헌을 받을 때까지 정치권 변곡점마다 정치권을 뒤흔들었다. 그 사이 민주정부 1기와 2기는 막을 내리고 실용주의를 표방한 이명박 정부가 2008년 2월 출범했다. 세금이 정권의 운명을 결정했다는 말이 나왔다.

◆盧정부 브레이크 없는 증세에 민심 ‘레드카드’

종부세의 가장 큰 특징은 ‘부동산’과 결부된 세금이라는 점이다. 외환위기 극복을 제1 과제로 삼았던 김대중 정부에서 저금리와 부동산 경기부양 등에 따른 유동성으로 집값이 꿈틀하자, 노무현 전 대통령은 취임 석 달 만에 부동산 과다보유자 5만∼10만명에 대한 누진적 적용을 골자로 하는 주택가격 안정화 대책을 발표했다. 100일 뒤 종부세란 이름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노무현 정부의 종부세는 ‘보유세는 높이고 거래세는 낮추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등 선진국 조세행정의 기초에서 출발했다. ‘낮은 보유세→투기 가수요 발생→부동산값 폭등’ 등의 악순환을 근절하겠다는 취지다.

결과는 실패였다. 사회적 공론화 과정 없이 속도전으로 추진한 데다, 정책의 일관성마저 실기하면서 정권의 부메랑으로 작용했다. 애초 정부가 정한 종부세 시행 시기는 2006년에서 1년 앞당겨졌다. 2003년 당·정 협의와 국정현안 정책조정회의 등을 거쳐 마련된 판교 등 노무현 정부의 신도시 개발로 ‘버블세븐’(비정상적으로 거품 가격이 형성된 강남·서초·송파·목동·분당·용인·평촌 등 7개 지역)이라는 신조어까지 만들어졌다.

종부세 대상이 공시지가 9억원에서 6억원으로 하향 조정된 이유도 이와 무관치 않았다. 이 과정에서 2005년에서 2006년 1년 동안 개인은 6만2000명에서 33만명, 법인은 8600개에서 1만3000개로 대상자가 급증했다. 세금은 두 배(5534억원→1조7180억원)를 훌쩍 넘었다.
 

증세의 당위론과 현실론이 강하게 충돌한 시기는 참여정부 때다. 진보정당이 전무했던 2004년 전까지만 해도 증세·감세 논쟁은 국내총생산(GDP) 성장 등 거시경제에 가려져 후순위로 밀리기 일쑤였다. 하지만 ‘탄핵 역풍’ 속에서 2004년 치러진 17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민주노동당이 진보정당 사상 첫 원내에 진입하면서 세금 논쟁에 불이 붙었다. 사진은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아주경제 최신형 기자]


◆盧대통령, 60%→22% 급락··· 이듬해 지방선거 1곳만 승리

종부세에 ‘세금 폭탄’ 등의 네이밍((naming·이름 짓기)이 달린 것이 이때부터였다. 미실현이익에 대한 ‘징벌적 과세’ 논란이 끊이지 않자, 노 전 대통령의 지지율은 급락했다.

여론조사전문기관 ‘한국갤럽’에 따르면 2003년 1년차 1분기 때 60%를 기록했던 노 전 대통령의 국정 지지율은 그해 2∼3분기 때 ‘40%→30%’로 하락하더니, 종부세 추진을 천명한 4분기 때 22%까지 추락했다. 노 전 대통령이 탄핵을 맞은 시점은 그 다음 분기인 2004년 3월이다. 물론 다른 요인도 적지 않았지만, 돈 문제인 종부세가 지지율 악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이 많았다. 

종부세 국회 통과 이듬해 치러진 5·31 지방선거(제4회 전국 동시 지방선거)는 여당인 열린우리당의 참패로 끝났다. 당시 16개 광역단체장 가운데 여당은 전북(김완주 지사·득표율 48.1%) 1곳 승리에 그쳤다. 광주시장과 전남지사도 탄핵 국면에서 갈라진 민주당에 뺏겼다.

한나라당(현 자유한국당)은 서울(오세훈·91.6%), 경기(김문수·59.7%), 인천(안상수·61.9%) 등 수도권 3곳을 비롯해 12곳에서 대승을 거뒀다.

여당은 기초단체장 230곳 중 19곳만 승리했다. 한나라당은 155곳, 민주당은 20곳, 국민중심당은 7곳, 무소속은 29곳에서 각각 이겼다.

배종찬 리서치앤리서치 본부장은 이날 “당시 선거 결과는 대통령 지지율과 네이밍, 야권의 대안 세력화 등에서 결정됐다”며 “문 대통령의 고공행진 지지율로 내년도 지방선거 전까지는 급격한 지지율 변화는 없겠지만, 이는 야권 세력의 부재에서 기인한 반사이익”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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