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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재천 아주경제 금융부장]
'태상하지유지'는 백성들이 임금의 존재만 아는 것이다. 탁월함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자연스럽게 다스리는 게 가장 훌륭한 통치라는 의미다. 훌륭하다고 인정받는 '존재감 충만한 지도자'가 아니라 그저 공기처럼 존재감만 느끼게 하는 것이 가장 위대하다는 뜻이다. 요즘으로 말하면 신문이나 방송에 얼굴을 많이 내미는 유명인이 아니라 편하지만 다정한 엄마 같은 스타일이다.
'기차친이예지'는 백성들이 임금을 칭송한다는 뜻이다. 백성들이 칭찬하고 이들과 친하게 지내는 유형이다. 한마디로 소통을 잘한다는 의미다. 그러나 여기에는 칭찬에만 연연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다.
'기차외지'는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는 지도자다. 임금 앞에만 서면 너무 두려워 아무 말도 못하게 만드는 스타일이다. 지금으로 말하면 독재정권이다. '기차모지'는 모든 사람들이 욕하고 업신여기는 지도자다. 국가를 막론하고 어떤 조직에서도 이 같은 리더는 차라리 없는 게 낫다.
노자가 말한 최상의 지도자는 공기 같은 존재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불가능하다. 아마 요즘 세상에서는 '기차친이예지' 정도가 정답일 것이다. 국민에 대한 염려와 사랑, 그리고 포용력을 지닌 지도자다. 하지만 대부분은 '외지', 즉 자신을 두려워하게 만드는 쪽으로 치우친다. 그러다 '모지', 아랫사람들로부터 업신여김을 받는 처지로 추락하고 만다. 최근 야당의 한 국회의원은 박근혜 전 대통령이 전형적인 '모지'의 사례라고 말하기도 했다.
최근 프랑스 대선이 화제다. 무소속 후보인 마크롱에 대한 관심이 특히 높다. 1977년생으로 올해 만 39세인 그에게 프랑스인들이 거는 기대는 상당하다. 언론에 보도된 마크롱의 장점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실력'이다.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나 좋은 교육을 받았고, 일찍부터 대통령에 필요한 경력을 쌓았다. 36세에 이미 재무부장관을 지냈다. 참신성, 개혁성, 극단으로 흐르지 않는 포용력도 프랑스인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있다. 단순히 젊거나 잘생겼기 때문에 인기가 있는 게 아니다.
우리나라도 대선도 코앞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젊고 스마트한 지도자들이 대세인 미국, 유럽 분위기와는 사뭇 다르다. 이번 선거전에서도 여전히 상대방을 비방하고 깎아내리는 행위가 끊이지 않았다. TV토론에 나와 자신의 정책은 설명하지 않았다. 어떻게 하면 상대를 궁지로 몰지, 창피를 줄 것인지에만 골몰했다. 고성이 오갔고 모르쇠로 일관했다.
정정당당하지도 않았다. 확인되지 않은 가짜뉴스로 상대를 공격했다. 가짜뉴스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재가공됐다. 인공지능을 얘기하고, 4차 산업을 논하는 2017년이지만 정치는 여전히 구태에 머물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대선 이후다. 혼란이 계속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새로운 정부가 들어서면 집권당이 바뀔 수도, 그러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가장 큰 문제는 지도자들의 대거 교체로 인한 갈등 증폭이다. 5년마다 심각한 풍토병(?)을 앓아야만 하는 우리의 현주소다. 그래도 정치 흑역사는 이쯤에서 멈췄으면 좋겠다.
대한민국을 일으켜 세웠던 조선, 해운, 철강 등 중후장대 산업들이 동시에 무너지고 있다. 글로벌 시장에서 자랑할 만한 은행 하나 만들지 못했다. K-팝이 유행이라지만 사그라든 지 오래다. 4차 산업에서도 손에 잡히는 결과물을 만들지 못하고 있다. 새로운 지도자에게 주어진 숙제가 많다는 얘기다.
이번 선거가 끝나면 대통령을 비롯해 정치인, 기업인, 국민 모두 자기 역할에만 충실했으면 한다. 특히 새로운 대통령은 '태상하지유지'까지는 아니더라도 서민들과 막걸리 한 잔 하며 소통하는 사이였으면 좋겠다. 경제부총리는 경제 회복, 사회부총리는 100년 교육대계에 집중하면 좋겠다.
정치 문외한이 누구나 아는 얘기를 왜 하느냐고 하겠지만 이 같은 기본적인 것들도 무시하는 '것'들이 선거 이후 또 나올까봐 걱정되기 때문이다. 많은 걸 바라는 것 같지 않은데 참 어려운 과제인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