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민하고 지질한 승훈을 파헤칠 때면 이따금 “따귀라도 올려붙이고 싶은” 느낌을 받을 때도 있었다. 다그치고 혼내고 싶을 정도로 승훈의 정신력은 나약했다. 미련하고 외로운 작업이었지만 조진웅은 언제나처럼 “만드는 사람이 괴로우면 그만큼 관객들은 즐겁다”는 생각으로 작품에 임했다.
영화 ‘해빙’(감독 이수연)은 우연히 살인의 비밀에 휘말려 두려움에 휩싸여가는 내과 의사 승훈과 그 주변 인물들의 팽팽한 심리를 담은 작품이다. 이번 작품에서 조진웅은 승훈 역을 맡아 예민하고 기민한 인물을 표현해냈다.
승훈의 옷을 벗고, 홀가분한 얼굴로 나타난 조진웅에겐 미안한 일이지만 ‘해빙’에 대한 집요한 질문들을 던져보기로 했다.
여타 작업과 ‘해빙’은 달랐다고
- 기능적인 역할이 아니었다. 배우가 대사를 읊고 연기하는 것을 뛰어넘어서 그 속에서 함께 고민해야 하고, 스스로 상황 쏙에 뛰어들어가야 했다. 배우 스스로 승훈을 경험하고 체험해야한다는 것이다. 연기할 땐 사실 ‘뭐,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었다. 그런데 제가 직접 상황 속에 휘말리게 되니까 능동적으로 움직일 수 있게 되더라. 배우로서 오묘한 지점이었던 것 같다. 기존의 방식으로는 표현할 수 없겠더라.
구체적으로 어떤 방식을 뜻하는 건가?
- 내 속으로 들어가야 하는 작업이라서 독특했다. 계산을 해버리면 재미가 없어지니 계산되지 않은 연기를 하려고 했다. 전혀 다른 답이 나온다고 해서 당황하지도 않았다. 그게 오히려 자연스러울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언밸런스(unbalance)하고, 언플러그드 (unplugged)한 작품이었다.
전혀 다른 답이 나왔다는 건 즉흥적인 부분들도 꽤 있었다는 이야기인가?
- 이수연 감독님은 시나리오에 충실하신 편이다. 그리고 제작진 모두 시나리오 자체에는 의심하지 않았다. 그 안에서 조금씩 연기적인 즉흥성을 가미했다는 이야기다.
‘해빙’은 촘촘하게 짜인 거미줄 같은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즉흥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 굵직한 지점들은 지켜갔다. 감독님과 팀원들이 중요한 지점들은 잘 짚고 가되 풍성하게 만들 부분들을 다듬어간 것 같다. 영화를 다 보고 나니 ‘완주를 했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보여주고 싶었던 부분들은 다 지켜간 것 같다.
영화는 승훈과 주변 인물들의 시점에 큰 변화를 겪는다. 이에 대해서도 계산하지 않았나?
- 그런 부분은 계산했다. 우리 영화는 관점, 시점에 대한 이야기니까. 이 지점을 움직이면 영화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또 우리 영화는 해석 놀음이라고 생각한다. 연기자들에게도 관객에게도 또 다른 재미가 있으니까.
앞서 말한 것처럼 승훈은 답을 정하고 연기할 수 없는 캐릭터다. 시점마다 변화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연기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참 힘든 작업이었을 것 같다
- 맞다. 정말 힘든 일이었다. 고민이 많이 되는 지점이기도 했다. 어떤 걸 염두에 두고 연기하니 재미가 없어지더라. 나 자신도 뭔지 몰라야 한다는 느낌이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되게 편안해졌다.
한 편의 연극 같다는 느낌도 들었다
- 비슷했다. 작업도 그랬지만 승훈이 맞닥뜨리는 상황들의 잔혹함도 그랬다. 이수연 감독님의 가학적인 스타일을 잘 알게 됐다.
이수연 감독님이 워낙 끝까지 가는 스타일 아닌가
- 여기까지 갈 수 있나? 그런 생각도 했다. 다크하시구나 하는 생각도. 하하하. 승훈이 무너지는 모습을 저도 즐겼으니까. 힘들지만 더 몰아붙이려고 했다. 우리가 힘들어야 관객은 편하니까.
‘해빙’만의 강점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 극장에서 보지 않으면 볼 수 없는 영화다. 이수연이라는 감독이 굳이 저렇게 공을 들여서 영화를 만드는 이유가 무엇일까? 저는 배우로서 그 밸런스를 직접 느끼고 보는 것이 참 즐거웠다.
불편함이 매력인 영화니까
- 연기할 때는 정말 신명 났다. 마음껏 연기하고 끝까지 몰아붙일 수 있었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영화를 완성하고 보니 홍보할 때도 추천의 말을 하기가 힘들어졌다. 끝까지 간다는 것이 장점이자 단점이다. ‘중산층의 몰락을 느껴보세요! 재밌고 흥미진진합니다!’
승훈이라는 인물을 연기하고 나서 조진웅에게도 어떤 영향이 미치진 않았나?
- 저는 수학할 땐 수학하고, 국어할 땐 국어 하는 스타일이다. 잘 버리고 다작도 가능하다. 그렇지 않으면 아내에게 따귀를 맞는다. 하하하. 현장에서만 확 집중하고 촬영장 밖에서는 잘 끊는다. 저는 배우들에게도 맺고 끊는 걸 잘해야 한다고 말해주고 싶다.
개봉한 시점에서 ‘해빙’을 돌아보자면?
- 이렇게 미련하고 외로운 작업은 처음이었다. 단언하건대 이 작품은 저의 도전을 관객에게 강요하는 작품은 아니다. 큐브를 다 맞춰놨고 그 과정을 관객과 함께 즐길 수 있다. 쉽게 즐길 수 있는 부분들도 있다. 승훈이라는 인물을 함께 경험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