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째, 국내성으로 가는 길은 아름답지만 마음 아픈 여정이다.
북한 신의주 맞은편 국경도시 단둥(丹東)에서 출발해 북한과 중국의 국경선인 압록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길은 아름답다. 압록강 강변을 따라 굽이를 돌고 작은 언덕을 넘으면서 유려한 곡선을 그려내는 드라이브코스는 가히 환상적이다.
그러나 중국 쪽은 나날이 발전하는데 강 건너편 북한 쪽은 나날이 황폐화되어가는 풍경에 눈이 아리고 속이 쓰리다. 중국은 한 뼘의 땅도 노는 땅이 없어지는데 강 건너편 북한은 들과 산은 비어만 갔다. 이따금 ‘우리식대로 살아가자’는 살풍경한 구호만이 헐벗은 민둥산에 새겨져 있어 속상한 마음이 더해졌다.
국내성은 백두산 남부 산악지대와 압록강이 나란히 좁다란 회랑을 이루며 달려가다가 잠시 쉼터에 들러 쉬어가는 듯한 분지에 위치해 있다. 우리나라 강원도 춘천평야의 절반에 불과한 좁은 평지형 도읍지 국내성은 땅이 척박하고 겨울은 몹시 춥고 여름엔 무덥다.
게다가 지형지세가 삼면이 산악을 앞에 두고 압록강을 등지고 있어 성을 수비하기에는 매우 불리하다. 실제로 동천왕때 위 나라의 관구검에게 분탕질을 당했고 고국원왕때는 전연의 모용황이 쳐들어와 미천왕의 시신을 빼앗겼고 왕비가 납치당하는 치욕을 당하기도 했다.
국내성을 답사하는 동안 필자의 머리속에는 ‘고구려’라는 이름의 최전방 공격수가 떠올랐다. 두 골을 실점당해 주눅 들거나 수세에 몰리지 않고 오히려 불굴의 투지로 공격을 감행해 내리 다섯 골을 득점해 역전시키는 속공 역습의 스트라이커! 고구려는 여기서 400년간 압록강을 배수진으로 삼고 한반도를 등받이로 삼았다. 국내성은 오로지 고구려의 북방대륙공략을 위한 전진기지, ‘닥치고 공격형 도읍지’였다.
셋째, 광개토대왕은 '동방의 알렉산더대왕'이다.
고구려 19대 광개토대왕(廣開土大王, 374~412년, 재위 391~412년) 시절의 고구려는 명실공히 동북아 최강대국이었다. 동북아의 모든 나라가 대왕의 위력 앞에 무릎을 꿇고 몸을 떨었다. 국내성 서북쪽 고구려 고분군 정남향에 우뚝 선 광개토대왕비는 중화사대사관에 물든 '삼국사기'가 말하지 않는 사실(史實)을 알려주고 있다.
광개토대왕의 우방은 당시 삼국중 최약체 신라였으며 제1주적은 중국(후연), 제2주적은 일본(왜)였다. 광개토대왕은 일본과 싸워 3전 3승을 거두었다. 즉위 원년인 391년 왜와 해상전을 벌여 승전했고, 396년(병신년)에는 신라를 돕기 위해 몸소 군대를 이끌고 가 왜와 백제 연합군을 토벌했다. 400년(경자년)에는 내물왕의 구원요청을 받고 보병과 기병 5만명을 파병해 왜적을 무찔렀다.
39세 젊은 나이에 죽은 광개토대왕이 98세에 죽은 장수왕처럼 오래 살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왜 우리 역사에는 제2의 광개토대왕은 나오지 않는가? 군사력 대신 경제와 문화로 세계를 제패하는 그런 제2의 광개토대왕을 기다리며 필자는 북방 왕들의 웅혼이 잠들어 있는 고분군을 오래 서성였다.
넷째, ‘427년 장수왕 평양천도’는 한민족사상 최악의 변곡점이다.
흔히들 고구려의 최전성기라는 장수왕(長壽王,394~491년, 재위 412~491년) 업적을 한 꺼풀 톺아보면 내세울게 별로 없다. 의외다. 재위 80년간 장수왕은 한반도 남방의 약소국 백제와 신라를 침략한 것 외에는, 좋게 말하면 ‘내실 다지기’, 나쁘게 말하면 ‘이대로가 좋아’ 라는 현상유지 정책의 일관이다.
얼마나 한 게 없으면 시호가 장수왕인가? 아버지는 땅을 넓혀 광개토대왕인데, 아들은 오래 산 게 업적이란 말인가? 장수왕은 북진정책의 광개토대왕과 정반대로 중국과 일본과는 친교를 맺고 백제와 신라를 적대시하는 남진정책을 펼쳤다.
'삼국사기'의 장수왕 기록 중 절반 이상이 북위에 대한 25회 조공기록이다. 한국 역사상 중국에 조공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왕이 바로 장수왕이다. 그래서 중국 일각에서는 장수왕을 '조공왕'이라도 부르며 애지중지(?)하고 있다.
광개토대왕과 정반대로 장수왕은 강자에겐 약하고 약자에겐 강한 군주였다. 중화(中華) 사대사관과 일제식민사관은 장수왕의 공적을 과장 미화하는 반면 광개토대왕 업적은 대폭 축소하고 있다.
고구려 세 번째 수도 평양(427~668년 도읍지)을 지난 2005년 10월 답사해 본 필자의 경험에 의하면 국내성은 베이징을 닮았고 평양은 난징을 닮았다는 생각이다. 휴전선이나 다름없는 만리장성 60㎞로 이남에 위치해 항상 깨어있어야 하는 '긴장의 도시' 베이징에 도읍을 정한 왕조들은 번영을 구가하며 장수했다. 반면 머나먼 남쪽 후방 평야지대에 물 좋고 땅 좋고 경개 좋고 미녀 많은 '이완의 도시' 난징에 도읍을 정한 왕조들은 비참한 최후를 마친 것이 오버랩됐다.
이윽고 필자는 반만년 한민족사상 최악의 변곡점은 ‘427년 장수왕 평양천도’라는 나름의 결론에 이르렀다. 427년 이후 한민족의 주 무대는 대륙에서 반도로 축소되었기 때문이다. 동시에 오늘날 한국이 세계 10위권 중견강국이 된 비결의 하나는 수도 서울이 휴전선과 가까워 최전방 국경도시나 다름없기에 베이징이나 국내성처럼 항상 깨어있어야 했던 덕택이라는 가설을 출발시켰다.
끝으로 다섯째, 장군총의 주인공은 ‘장수왕’이 아니라 ‘광개토대왕’이다. 필자의 국내성 5회 답사 하이라이트는 5회 모두 장군총이다. 갈 때마다 가장 오래 머무르고 가장 많이 깊이 오래 사색한 시공간이 바로 장군총이다.
흔히 장수왕 무덤으로 알려져 있는 장군총을 중국에서는 ‘장군분(將軍墳)’이라 하는데 ‘동방의 금자탑’(東方金字塔)이라는 별칭으로 부르며 아시아 최고의 피라미드형 분묘라고 높이 평가하고 있다. 즉 왕릉의 규모로는 진시황릉이 최대, 묘제양식의 우수성으로는 장군총이 최고라는 게 중국학계의 보편적인 정평이다.
그렇다면 장군총의 주인공은 누구인가? 대개 한국에서는 장군총을 장수왕릉으로 추정하고 장군총이 소재하고 있는 중국과 이 지역을 지배한 바 있는 일본(20세기 전반)에서는 장수왕으로 추정했다. 특기할만한 대목은 북한에서도 과거에는 장군총을 장수왕으로 추정했는데 1990년대 ‘단군릉’ 발굴 발표를 전후한 1990년대부터 장군총을 장수왕릉으로 ‘추정’ 아닌 ‘간주’하고 있다.(1)*
그런데 필자는 장군총을 답사할 때마다 장군총의 주인공이 장수왕이 아니라 광개토대왕릉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답사횟수에 정비례하여 5분의 1씩 늘어갔다. 지금은 장군총의 주인공은 광개토대왕이 확실하다고 간주한다.
장군총의 주인이 장수왕이 아니고 광개토대왕인 증거 다섯가지를 요약해보겠다.
첫째, 400년 도읍지 국내성을 버리고 427년 평양으로 천도해 65년간 평양에서 왕으로 누리며 살다가 491년 평양에서 죽은 장수왕을 굳이 머나먼 국내성에 매장할 이유가 있을까.
장수왕의 시신을 평양에서 한반도에서 가장 험준한 낭림산맥 등 산맥들을 넘고 청천강 등 강천들을 건너 국내성으로 운구하려면 당시 교통상황으로서는 최소 6개월 이상 걸린다. 장수왕의 주검을 국내성에 매장해야할 역사∙지리적 근거가 매우 취약하다.
둘째, 광개토대왕무덤이라 알려진 태왕릉 석실은 광개토대왕릉비와 반대 방향인 반면 장군총 석실은 광개토대왕릉비와 같은 방향이다. 또 장군총의 석질과 광토대왕릉비의 석질이 비슷하다. 장군총의 양식은 전형적 돌무지무덤, 즉 적석총(赤石塚) 양식으로 고구려와 백제 초기 무덤형식에 속한다. 장군총과 백제초기의 석촌동고분이 같은 돌무지무덤양식이다. 한데 장수왕 재위 시기는 5세기로서 적석총은 사라지고 돌방무덤, 즉 석관묘(石棺墓)형식이 보편적 묘제로서 자리잡은 시대이다. 따라서 적석총의 전형 묘제인 장군총의 주인공은 장수왕이 아니라 광개토대왕이다.
셋째, 중국측 사료 대부분은 장군총의 적석총 형식은 광개토대왕이 재위기간인 4세기말에서 5세기 초에 축조된 것으로 본다. 하지만 장군총의 주인공은 장수왕(412~491년)으로 추정된다고 적고 있다. 그야말로 ‘모순의 전형’ 아닌가! 491년에 죽은 장수왕이 타임머신이라도 타고 와서 백년전에 만들어진 장군총 속으로 들어가기라도 했단 말인가?
넷째, 장군총 주인공이 장수왕이라는 일본학설은 의외로 소수설이고 초기학설에 불과하다. 장수왕설은 1905년 최초로 현지를 조사하고 글을 발표한 도리가(鳥居龍藏)와 1920년대 미카미(三上次男)단 둘 뿐이다. 장수왕설의 주요 논거는 평양으로 천도한 장수왕이 살아있을 때 자신의 무덤을 옛 도읍지 국내성에 수축하였을 것이라는 거다. 이러한 추정의 근거문헌 '후한서'. '동이열전' 고구려전에 “장례에 사용할 물건들을 조금씩 미리 준비한다”로 설득력이 떨어진다.
반면에 광개토대왕설은 의외로 다수설이고 갈수록 통설이 되어가고 있다. 도리가와의 함께 장군총을 조사 연구한 프랑스 고고학자인 사반(Eduard Chavannes)이 1907년 발표한 글에서 장군총 무덤근방에서 목패(木牌)를 발견했는데 목패 위에 ‘호태왕지위(好太王之位)’를 보고 광개토대왕릉으로 추정했다. 또 광개토대왕비를 변조한 혐의를 받고 있는 세키노(關野貞)조차도 1913년 장군총을 광개토대왕비와 관련시켜 광개토대왕릉으로 보았다.
특히 주목해야할 대목은 1980년대 이후 일본학계의 통설이자 다수설은 장군총의 주인공은 광개토대왕이라는 사실이다. 최근 일본 학자 나가지마(永島暉臣愼)와 다무라(田村晃一)는 장군총에서 보이는 와당양식의 연구 소견과 장군총과 광개토왕릉비가 서로 마주보고 있는 등의 상황을 근거로 장군총이 광개토왕릉이라고 보고 있다. 즉 추정 아닌, ‘장군총=광개토대왕릉’ 으로 간주하고 있는 것이다.
끝으로 다섯째,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수도를 천도하면 군주의 능묘는 새로운 수도 인근에 위치하는 게 정상이다. 옛 수도에 매장한 사례는 거의 없다. (고대 이집트 30개 왕조, 중국 역대왕조 전수 분석((2)*)
우리나라 웅진(공주)시대 백제 25대 무령왕릉은 공주 송산리 고분군에 있고, 사비(부여)로 천도한 26대 성왕릉은 부여능산리 고분군(2호분 추정)에 있다. 고구려 19대 광개토대왕은 국내성에, 평양으로 천도한 고구려 20대왕 장수왕릉은 평양에 위치할 거라는 추론은, 가능성을 훨씬 넘은 개연성에 가깝다.(3)*
따라서 북한이 1994년 10월, 장군총을 모델로 삼아 장군총 세 배 규모로 축조한 ‘단군릉’의 주인공이 단군이 아니라 실제는 장수왕이 아닐까 하는 강한 합리적 의심이 든다.
강효백 경희대학교 법학과 교수
※외부 필진 칼럼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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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1)*이 글을 다 읽으면 북한이 유독 장군총의 주인공이 장수왕이라고 추정 아닌, 간주하게 된 숨은 이유를 알 수 있다.
(2)*수도의 왕릉을 신수도로 이장한 사례는 간혹 있다. 예: 졸본(중국 랴오닝성 환런)에 있던 고구려 초대왕, 동명왕릉을 평양으로 이장한 사례
(3)*북한정권이 발표 확인한 평양부근의 왕릉은 고조선 초대 단군릉과 고구려 초대 주몽의 무덤 동명왕릉 2기뿐이다. 정작 427년 장수왕의 평양 천도부터 668년 고구려가 망할때까지 장수왕·문자왕·안장왕·안원왕·양원왕·평원왕·영양왕·영류왕·보장왕 등 아홉 명의 왕의 왕릉은 하나도 없다. 고구려가 초기 부족국가를 벗어나 고대국가로 향하던 시대의 수도 국내성에는 확인 또는 추정된 고구려왕릉이 여럿인데 명실상부한 동방의 강자 고대국가 고구려 시대의 수도 평양에서는 고구려왕릉으로 발굴 또는 추정된 게 하나도 없는가? 신라의 왕릉들은 56명의 왕 중 37명의 왕의 능묘가 확인되었거나 추정되었고, 백제의 왕릉들도 공주 송산리 고분군 25대 무령왕릉을 포함한 7기, 26대 성왕릉으로 추정된 2호기 부여 능산리 소재 7기의 고분군이 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