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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경제 최송희 기자 = 배우가 기억하는 작품 속 최고의 명장면은 무엇일까? 배우의 입장, 관객의 입장에서 고른 명장면을 씹고, 뜯고, 맛본다. ‘별별 명장면’은 배우가 기억하는 장면 속 특별한 에피소드와 의미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코너다. 44번째 타자는 영화 ‘판도라’(감독 박정우·제작 (주)CAC엔터테인먼트 공동제작·(주)시네마파크·배급 NEW)의 주인공 김남길이다.
“가장 인상 깊은 신은 역시 마지막 장면인 것 같아요. 재혁이 희생을 결심, 홀로 원전 안에 남게 되는 신이었는데 찍을 때 정말 힘들었어요. 죽을 것 같더라고요.”
김남길이 언급한 장면은 ‘판도라’의 하이라이트 신이기도 하다. 원전 폭발로 직원들은 물론 지역 주민들이 위험에 처한 상황에서 재혁은 2차 폭발을 막기 위해 홀로 원자력 발전소에 남기로 결심한다. 거대한 영웅 심리나 비장한 구석이 없는 아주 평범한 남자 재혁은 극도의 공포를 느끼고, 가족들에 대한 그리움을 토해내면서도 그들을 위해 기꺼이 희생한다.
“그 장면을 찍을 때 정말 예민했어요. 배가 부르면 감정도 안 나오고, 집중도 안 되는 터라 이틀을 내리 굶었죠. 실제로 체력도 바닥나고 감정도 소모된 상태라 말 한마디, 한마디 꺼내는 게 힘들었어요.”
원전에 홀로 남기로 결정한 재혁은 이미 지칠 대로 지친 상태. 김남길은 재혁에 조금 더 가까워지기 위해 극단적인 이입을 시도했다.
“죽음에 대해 깊게 고민했던 시기였어요. 재혁을 이해하기 위해 다큐멘터리를 자주 봤는데 사람과 동물의 죽음에 관한 영상을 많이 봤던 것 같아요. 이틀 내리 굶고, 예민한 상태에서 다큐멘터리를 보며 펑펑 울었죠. 체력이 남아났겠어요. 심적으로 육체적으로 고생한 것에 비해서 화면에서는 그 고통이 많이 드러나지 않은 것 같아서 아쉽기도 해요. 그 장면을 몇 차례 더 찍으니까 아예 감정도 안 잡히더라고요. 처참했죠.”
극도의 예민 상태였다. 스태프들이 모여 모니터를 하는 가운데, 김남길은 저도 모르게 눈치를 봤고 제 연기에 대해 점차 자신을 잃어갔다. “아쉽다는 이야기만 들어도, 연기가 아쉽다는 건지” 자꾸만 주눅이 드는 것이었다.
“오죽하면 조감독에게 ‘더는 못 찍겠다’고 했겠어요. ‘내가 나를 아는데, (감정이) 더 안 나와’라고 털어놨죠. 자존심도 상하고 눈물이 막 나더라고요. 모든 게 힘들었지만, 특히 한계를 인정해야 하는 게 힘들었던 것 같아요.”
하지만 유쾌한 박정우 감독은 “한 번 더 찍자”며, 김남길에게 하이라이트 신 재촬영을 요구했다고.
“예민해서 몸이 터질 것 같더라고요. 스태프들이 옷매무새를 다듬어주는 데도 그냥 화가 날 지경이었어요. 결국, 다들 걱정하는 마음에 ‘그만하자. 이러다 죽겠다. 욕심부리지 말자’고 하는데, 결국 한 번 더 찍었어요. 사람들이 보기에 내가 죽을 것처럼 보인다면, 이 감정 그대로 연기하면 되지 않을까? 그런 기대감이었죠.”
캐릭터와의 일체감 그리고 완벽한 몰입이 이뤄낸 하이라이트신은 관객들에게도 손꼽히는 명장면이 됐다. 김남길의 심적, 육체적 고통이 녹아든 장면은 영화 ‘판도라’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12세관람가이며 러닝타임은 136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