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 씨가 대통령의 연설문을 고친 흔적이 담긴 태블릿 PC가 언론 보도를 통해 물증으로 나오기 전까지 청와대와 정부는 모든 의혹을 낭설로 취급하며 전면 부인했다. 물증이 나오자 청와대는 1차 담화문을 발표하고 정치권의 움직임에 따라 두 차례 추가 발표로 대응하면서 총 세 차례의 대국민 담화문을 발표했다.
◆ 언론의 최순실 의혹 제기···국회와 靑의 자충수
최순실 게이트는 지난 9월 20일 한겨레신문이 ‘최 씨가 대기업들에게 미르재단 출연금을 강제로 뜯었다’는 내부자의 증언을 바탕으로 한 보도를 하면서 불이 붙었다. 이전에도 몇 차례 몇몇 언론의 문제제기는 있었지만 본격적인 방아쇠를 당긴 셈이다.
이후 국정감사를 거치며 야권에서 의혹제기를 이어가던 가운데 지난 10월 24일 JTBC가 최 씨 소유로 추정되는 태블릿 PC를 공개했다. 물증이 나오자 청와대는 즉각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박 대통령은 태블릿 PC 보도가 나온 다음날인 10월 25일 1차 대국민 담화를 통해 연설문 개입 사실을 인정하며 사과를 했다. 그러나 연설문 개입 외 나머지 의혹은 부인한 첫 번째 담화는 오히려 촛불을 키우는 도화선이 됐다.
대통령의 1차 담화가 있던 그 주에 시작한 1차 촛불집회에 참가한 인원은 3만명(주최측 추산)에 불과했지만, 이후에도 대통령이 반성은커녕 거짓말을 거듭하자 △2차 20만명 △3차 100만명 △4차 96만명 △5차 190만명 △6차 232만명 등으로 급격히 번졌다. 불과 한 달 사이에 집회 참여 규모가 70배 이상으로 늘어났다.
정치권도 외혹이 제기된 초창기 사태파악을 하지 못한 채 헛발질을 거듭했다. 민심은 대통령의 즉각 하야를 요구함에도 불구하고 야권은 국정농단 의혹을 규명하기 위해 △특별검사제 △국정조사 △거국내각총리 등을 요구하며 민심과 괴리된 행보를 보였다.
결국 촛불민심에 떠밀려 야권과 여권 비박(비박근혜)계는 탄핵열차에 몸을 실었다. 사상초유의 국정농단 사태가 발생했음에도 정치권은 각자의 이해득실을 따지는 셈법에만 골몰하는 모습을 보이며 민심으로부터 버림받은 셈이다.
◆ 대통령, 대민국 담화의 역효과···촛불집회 확산 도화선
태블릿 PC 보도가 나온 바로 다음날인 지난 10월 25일 박 대통령은 1차 대국민 담화를 통해 사과를 표명했다. 박 대통령은 당시 “저로서는 좀 더 꼼꼼하게 챙겨보고자 하는 순수한 마음으로 한 일인데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국민 여러분께 심려를 끼치고, 놀라고 마음 아프게 해 드린 점에 대해 송구스럽게 생각합니다”라고 말했다.
또 "청와대 보좌체계가 완비된 이후에는 (최순실에게 연설문 도움 요청을)그만뒀다"고 언급했다. 그러나 곧바로 언론보도를 통해 올해 4월까지 최 씨가 개입한 사실이 드러나면서 대통령의 거짓 해명이 또 다시 도마에 올랐다. 1차 담화 후 지난 10월 30일 최 씨도 귀국했다. 최 씨는 귀국 다음날 검찰에 체포됐는데, 검찰에서 최 씨의 진술이 박 대통령의 담화문 내용과 일치해 사전에 입을 맞춘 것이 아니냐는 의혹까지 증폭됐다.
사태 수습을 위해 지난 11월 4일 박 대통령은 2차 대국민 담화문을 발표했다. 박 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특정 개인이 여러 위법 행위를 저질렀다고 하니 안타깝다"며 여전히 자신과 최 씨의 연결고리를 차단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면서 “검찰 조사를 성실히 받겠다”고 언급했지만 이 또한 며칠 지나지 않아 말을 바꾸며 공분을 샀다.
박 대통령은 2차 담화 이후 오히려 유영하 변호사를 자신의 변호인으로 선임하면서 검찰 수사의 중립성 등을 거론하며 강공 모드로 돌변했다. 검찰 조사에 협조하겠다던 담화문의 발언을 뒤집은 셈이다. 더불어 헌법 제84조가 보장하는 대통령 임기 중 불소추특권을 이용해 검찰 수사를 무력화시키려는 움직임까지 보이기 시작했다.
2차 담화문 발표 즈음 촛불은 이미 190만명까지 불어나 있었다. 위기감을 느낀 박 대통령은 3차 담화를 통해 마지막 카드를 던졌다. 그러나 이마저도 치밀하게 기획된 정계개편 시나리오가 함축돼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결국 청와대는 백기를 들었다.
박 대통령은 지난 11월 29일 3차 담화에서 “대통령직 임기 단축을 포함한 진퇴 문제를 국회의 결정에 맡기겠다”라며 “여야 정치권이 논의하여 국정의 혼란과 공백을 최소화하고 안정되게 정권을 이양할 수 있는 방안을 말씀해주시면 그 일정과 법 절차에 따라 대통령직에서 물러나겠다”고 말했다.
언뜻 보기엔 자진 사퇴를 의미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담화 직후 친박계가 임기단축을 위한 개헌안 등을 들고 나오면서 속셈이 드러났다는 지적이다. 실제로 개헌에 동의하는 김무성 전 새누리당 대표 등 비박계 일부를 흔드는 효과를 거두기도 했다. 비박계 내에서 기존 탄핵안 동참 의견을 유보하는 모습이 보였기 때문이다.
이와 동시에 친박계에서는 '내년 4월 퇴진, 6월 조기대선' 카드를 꺼내들고 탄핵의 동력을 떨어뜨리려는 시도를 감행했다. 그러나 청와대의 마지막 카드는 들끓던 촛불을 곧장 200만명 이상으로 단숨에 끌어올리는 역효과만 낳았다. 232만명이 모인 지난 3일 6차 촛불집회를 통해 뒤늦게 민심을 파악한 비박계는 기존 입장을 번복, 청와대의 조기퇴진 수용 여부와 관계없이 탄핵 동참을 선언했다.
우여곡절 끝에 야3당과 비박계는 탄핵열차에 함께 탑승했다. 청와대와 친박계는 마지막까지 최 씨의 태블릿PC 입수 경위 등을 문제 삼으며 저항했지만 탄핵열차를 멈추기엔 역부족이었다. 탄핵안 부결 시 평화 시위에서 폭력 시위로 변모, 국회 해산 등 온갖 가능성이 열린 상태로 전운이 감도는 가운데 대통령 탄핵안이 가결됐다. 대한민국 헌정사에서 가장 긴 두달 반의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