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감리교의 출발 인천내리교회

2016-11-09 1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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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최초 감리교 예배와 인천

아주경제 박흥서 기자 =1884년 여름, 조선을 방문한 맥클레이(Mcclay,R.S.)는 고종으로부터 선교 윤허를 받았다.

당시 맥클레이는 일본에 체류 당시 친분을 맺었던 김옥균(金玉均), 미국 초대 주한미국공사 푸트(Foote,L.H.)와 동반하여 고종에게 선교의 뜻을 전했다. 고종은 병원과 학교를 먼저 개설하고 점차 선교할 것을 권했다.

한편, 1884년 12월 4일 발발한 갑신정변(甲申政變)에서 왕실의 외척 민영익(閔泳翊)이 개화당의 습격으로 치명상을 입었다.

이때 선교사 알렌(Allen,H.N)이 그를 치료하였는데, 이 일로 서양인과 기독교에 대한 왕실의 신임이 커졌다. 조선 선교를 위하여 선교사 파송을 염두에 두고 있던 감리교와 장로교에서는 각각 아펜젤러와 언더우드를 보냈다.

1885년 4월 5일 부활절, 아펜젤러와 언더우드가 제물포를 통하여 조선에 첫 발을 디뎠다.

당시 언더우드는 서울에 입성하여 제중원 교사로 활동을 시작한 반면, 아펜젤러는 상황이 여의치 않아 인천에 머물다 1885년 4월 13일 일본으로 돌아갔다.

같은 해 6월 20일, 아펜젤러는 다시 한국을 찾았고 인천에 머무르다가 6월 28일 외국인을 위한 한국 최초의 감리교 예배를 인도하였다. 최초로 풍금을 들여와 찬송과 예배를 봉헌한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1889년 서울에 선교의 터를 구축한 감리교 선교사들은 곧 인천 선교에 착수하여 청국 조계 내에 초가집 2채를 구입하여 감리교 서점을 열었다. 하지만 청국 조계가 조선인 거류지와 거리가 떨어져 있는 관계로 전도에는 어려움이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1891년 6월 아펜젤러가 인천 지역 선교 책임자로 임명되었다. 그는 서울에 머물면서 배재학당에서 강의를 했는데, 주말마다 말을 타고 인천에 와서 전도를 하면서 예배당의 필요성을 느꼈다.

따라서 35.6㎡(10.8평) 규모의 예배당을 건축했다. 바닥에 마루를 깔고 외벽에 석회를 발랐으며 두 개의 방을 둔 이 예배당은 비록 작은 규모였지만 기존 건물을 활용한 것이 아니라 예배를 위해 새롭게 건축되었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갖는다.

교인이 점차 증가하면서 1901년 내동에 웨슬리 예배당을 새롭게 건립했다.

1901년 준공된 내리교회[1]


1955년 웨슬리 예배당이 멸실되자 이후, 두 차례에 걸쳐 예배당 건립이 진행하었고 화재와 철거 등을 반복하다가 1985년 창립 100주년 기념 예배당을 완공했다. 2012년에 옛 웨슬리 예배당을 복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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