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亡羊補牢]’는 속담은 ‘이미 일을 그르친 뒤에 뉘우쳐도 소용없음’을 뜻한다.
하지만 실질적으로 사전에 대비하는 것이 쉽지 않고 사후의 감계(鑑戒) 또한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소를 잃은 후에라도 외양간을 고치는 것이 마땅하다.
물론 소를 잃거나 잃지 않음은 큰 차이가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면 소를 잃기 전에 외양간을 고쳐야 할 것이다.
우리는 국사 수업시간에 두 개의 천리장성을 배운다. 요동 일대에 631년~647년 간 축조된 고구려의 천리장성이 있고, 평안·함경도 일대에 1033년~1044년 간 건립된 고려의 천리장성(별칭 고려장성)이 있다. 이들은 기본적으로 양 국가의 중추적 방어체계 구축을 위해 축성되었다는 공통점이 있지만, 언급한 축성의 시기나 장소 외에도 축성의 배경이나 효과 등에서 분명한 차이가 있다.
고구려는 16년(598~614년) 간 4차에 걸친 수나라와의 대전(大戰)을 통해 요동 방어체계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고, 당 태종의 즉위 이후 대외 팽창을 꾀하는 당나라의 정책에 대비해 비사성~부여성의 650㎞ 구간에 기존의 성(城)을 보완하는 새로운 성(城)을 증설했다.
이렇게 강화된 요동방어체계는 645년 당나라의 1~2차 침입 방어에 큰 역할을 했고, 특히 1차 침입에서 전장(戰場)을 국경 일대로 한정해 고구려의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었다.(2~3차 침입의 경우 당군 주력은 요동방어선을 우회해 수로로 진군) 고구려가 멸망한 668년 이후에도 안시성을 포함한 40여개의 성지는 존속되어 대당항쟁을 지속하는 한편, 698년 발해의 건국에 든든한 기반이 되었다.
한편 고려는 거란과 여진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해 압록강 하류~도련포의 400㎞ 구간에 기존의 성책을 연결·보축(補築)했다. 직접적인 축성 계기는 1019년을 기해 종료된 요나라와의 3차례 전쟁이었다. 이 전쟁에서 요나라를 격퇴하기는 했지만, 26년간의 전쟁에서 수도 개경이 함락되기도 했고 청야전술(淸野戰術)로 국토가 초토화되는 등 한반도 내부가 전장(戰場)이 됨에 따른 피해는 상당했다.
물론 이 축성으로 고려는 요나라의 추가적인 침입 야욕을 봉쇄하고 장기적인 북방 국경선을 구축할 수 있었지만, 요나라와의 전쟁이 끝난 이후에 축성되어 전시(戰時)에 활용되지 못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고구려가 당나라와의 전쟁을 예견했듯이 고려 또한 요나라와의 전쟁을 예견했다. 942년 만부교(萬夫橋) 사건(요나라 사신 30명을 귀양보내고 선물인 낙타를 만부교에서 굶겨 죽임)을 기해 양국의 관계는 악화되었고, 요나라의 침략 움직임에 고려는 친송(親宋)·북진(北進) 정책으로 대응하고 있었다. 즉 기정사실로 다가오는 요나라와의 전쟁에 고려는 광군(光軍; 일종의 예비군) 설치, 청천강 이북지역에의 성곽 구축 등의 사전 대비를 했지만, 가장 강력한 방어수단이 될 수 있었던 천리장성은 전쟁 기간에 활용할 수 없었다.
사전 대비가 사후 보결(補缺)에 앞선다는 것은 분야를 막론하고 적용되는 절대 진리이다.
특히 안보·국방의 경우 사전 대비가 미흡하면, 적게는 국민이 평화롭지 못하고 크게는 국가의 운명이 흔들릴 수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고구려와 고려가 구축했던 천리장성의 축성 시기는 오늘날 대한민국에 큰 함의를 준다. 특히 대량살상무기에 의한 절멸(絶滅)이 가능한 현대의 전쟁에서 그 방어 또는 억지(抑止)가 가능한 수단이 언제 배치되어야 할지는 조금만 생각해 보아도 알 일이다.
천 년 전에는 소를 잃었으되 모두 잃지는 않았기에 외양간을 고치는 것이 의미가 있었으나, 소는 물론 소가 먹을 잡초마저 모두 사라진다면 외양간을 고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겠지만 설사 고친다 해도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