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경제 임봉재 기자 = 뜨거운 여름이 가고 어느새 선선한 바람이 밤낮으로 불며 본격적인 가을이 다가왔다.
나뭇잎이 하나둘 붉은색으로 옷을 갈아입으며 어디든 떠나고픈 마음이 절로 솟는다.
가까운 곳에서도 가을 나들이를 즐기기에 충분한 명소가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경기 의정부시 중에서도 수려한 수락산 자락에 위치한 서계 박세당 고택은 역사와 힐링을 만끽할 수 있는 곳 중 하나로 꼽힌다.
천고마비의 계절, 가을바람으로 허전한 마음을 채워줄 서계 박세당 고택의 매력을 만나보자.
▲수락산 자락에 위치…명당 중 명당
서계 박세당 고택은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93호다. 집 바로 뒤는 수락산이고, 마루에 앉아 바라보면 도봉산 줄기가 멀리 눈에 들어온다. 풍수를 잘 모르는 눈으로 보아도 명당임을 한눈에 알 수 있다.
조선 후기 실학자 서계 박세당 선생이 은거했던 사랑채다. 건물은 앞면 5칸, 옆면 2칸반 구조로, 누마루가 덧붙어 '을(乙)'자형이다. 세월의 때가 묻어 있지만 그런 풍취 때문에 오히려 옛 선비의 처소로서 품위를 간직하고 있다.
특히 초등학생들의 현장학습장과 숙박체험, 오감만족 힐링을 하기에 적합한 곳으로 인기를 끌고 있다.
▲조선 사상계의 대표 지성, 서계 박세당 선생
서계 박세당 선생은 17세기 후반 조선을 대표하는 사상가 중 한 사람이다. 병자호란 이후 조선의 정계를 움직이던 양반사대부들은 숭명배청, 복수설치를 내세우며 주자학으로 중무장해 다른 사상을 허용하지 않았다.
그 맨 앞에 우암 송시열이 있었다. 이때 송시열과 같은 서인계 중진으로 명망이 높았던 박세당 선생이 나섰다. 그는 비록 주자의 해석이라 해도 모두 옳은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는 '대학'과 '중용'을 새롭게 편집하고 해석을 붙인 '사변록'을 펴냈다. 또 '남화경주해'를 저술, 유학에서 이단으로 취급했던 장자를 적극적으로 옹호하기도 했다. 이처럼 박세당은 조선 사상계의 지평을 넓혔던 인물이다.
그는 나이 마흔에 벼슬을 버리고 수락산 석천동에 들어왔다. 자신의 호를 '서계(西溪)'라 했다. 그의 호에는 자신보다 먼저 이곳에 살았던 매월당 김시습을 흠모하는 정과 수락산을 사랑하는 마음이 오롯이 들어있다.
그가 매월당 김시습을 그리며 지은 칠언율시 마지막에 '동봉 달빛 서계의 물을 비추네(동봉월조서계수)'란 구절에서 짐작하듯 '서계'란 그의 아호는 김시습의 아호 '동봉'의 대어다.
그는 이곳에서 농사를 짓고 찾아오는 젊은 선비들을 가르치는 일을 즐거움으로 삼았다.
또 그는 농사를 지은 경험을 바탕으로 '색경'을 지었다. 1703년 75세의 일기로 별세하기까지 석천에서 살았던 그는 진정으로 수락산을 사랑한 선비였다.
하지만 당시 주류였던 노론계 인사들은 그에게 '사문난적'이란 붉은 딱지를 붙여줬다.
송시열도 인정한 소론 출신의 인물, 그가 바로 박세당의 둘째 아들 박태보다.
1689년 숙종이 후궁 장희빈이 왕자를 낳자 세자로 세우고 계비인 인현왕후를 폐위하고 노론을 실각시키고 소론으로 바꿨다.
이때 소론의 핵심 인물인 박태보가 이를 반대하는 여론을 주도하고 목숨을 건 상소를 올렸다. 결국 박태보는 숙종의 분노를 사 벌겋게 달군 인두로 온몸을 지지는 국문을 당한 뒤 초주검이 되어 유배에 올랐으나 노량진에서 숨을 거두고 말았다.
훗날 나라에서는 박태보의 학문과 충절을 높이 평가해 영의정에 추증하는 동시에 시호를 '문열'이라 하고 그를 추모하는 뜻에서 노강서원을 건립했다.
▲박세당 선생 서계유묵 보물로…
조선 숙종시대 최고의 문필가였던 서계 박세당 선생의 필적 '서계유묵'은 국가 보물로 지정돼 있다.
그가 69세때인 1697년 친필로 제자들과 아들 박태보 등 친척에게 쓴 편지를 묶은 서계유묵 3권이 국가지정문화재인 제1674호 보물로 지정됐다.
그가 자연을 노래한 시 구절과 은자를 상징하는 삶의 철학이 담겨 있는 서계유묵은 가로 35㎝, 세로 24㎝ 크기의 첩장 구조로 된 '지본묵서'다
의정부에 사는 10대 손인 박범서씨가 소장해오다가 현재는 한국학중앙연구원에 보관중이다.
그의 학문연구와 후진양성에 힘쓰며 저술활동을 하던 사랑채(경기도 문화재자료 93호)와 그의 묘(경기도 문화재자료 113호), 아들 박태보의 위패 사당이 있는 노강서원(경기도 기념물 41호)은 모두 수락산 기슭에 위치해 있다.
▲주말이면 붐비는 수락산
'수락산'은 여름과 가을은 물론 사계절 잘 어울리는 산이다. '수락'은 '물이 굴러 떨어진다'는 데서 유래했다.
산 전체가 화강암과 모래로 이루어진 골산이다. 하지만 억세다는 느낌은 없다. 그래서인지 '누구나 쉽게 오를 수 있는 산'으로 수락산을 소개하는 글이 많다. 산을 잘 아는 사람은 결코 이 산을 호락호락한 산이라 말하지 않는다.
수락산은 의정부시와 남양주시에 걸쳐 있다. 조선시대에는 양주목에 속해 있던 산이다. 조선 영조 때의 실학자 신경준이 지은 '산경표'에는 수락산을 '백두대간에서 뻗어 내린 한북정맥에 속하는 산'으로 소개했다.
'신중동국여지승람'에는 '불암산 서북쪽에 있다'고 했고, '여지도서'에는 '포천 축성령에서 남쪽으로 나온 산'이라 해 산맥이 이어졌는지 짐작할 수 있다.
수락산은 동쪽 내원암 일대와 서쪽 석림사 일대도 물이 좋아 여름 내내 인산인해를 이룬다. 수도권에서 찾기 쉬울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 맑고 시원한 계곡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학림사로 가는 길목 산행코스를 알리는 안내판이 서 있다. 안내판에 소개된 코스만 해도 7개나 될 정도로 수락산을 오르는 길은 다양하다.
또한 수락산에 위치하고 있는 학림사는 조계사의 말사로 671년 '원효'가 창건한 가람이다. 대웅전 옆에 자리 잡은 소나무 그늘에서 잘생긴 미륵불은 볼 만하다.
산 허리를 한참 돌아 명성황후가 머물렀던 용굴암은 역시 명당이다. 1882년 시아버지인 대원군의 섭정에 밀려난 명성황후가 이 바위굴에서 7일 기도를 드리고 나서 다시 집정을 하게 되자 그 공덕을 기리기 위해 이곳에 법당을 지었다고 전해진다.
자연동굴인 용암굴에 나한상을 모셔 놓고 있다. 대웅전에 낮아 불암산 전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가파른 계단을 오르면 도솔봉이고, 여기서부터 수락산 주능선이 1.3㎞ 펼쳐진다. 탱크바위, 철모바위, 배난바위 등 이어지는 산봉우리 이름이 재미나다.
산과 함께하는 역사여행으로 서계 박세당 선생의 고택을 방문하고 난 후 수락산 정상을 따라 등산을 즐겨볼 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