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마윈이 누구던가, 또 하나의 중국사로 불릴 만큼 방대한 진용의 무협소설 속의 온갖 초식(招式)을 필살의 혀로 내공화한 그가 아니던가, 마윈은 중국 흑사회의 은어와 미국암흑가의 슬랭을 동시에 고급영어로 전환시키며 협객풍의 말투로 호쾌하게 응수했다.
“우하하. 과연, 대붕은 대붕을 알아보는군! 그렇지, 라스베이거스 협객 보스가 중국 전통비밀결사 홍방(紅帮 Hong Bang) 지파(支派) 두령을 몰라볼 리가 없지. 나는 오랜 세월 항저우 호반에 은거하며 귀형을 흠모해왔던 터. 이렇게 여기 사막의 성채를 친히 배알하게 됐다. 요즘 세간에는 천라지망, 즉 하늘의 그물과 땅의 그물이라는 ‘인터넷’이 풍미하고 있다. 귀형과 함께 이 인터넷사업을 크게 벌이고자 한다. 우리 서로 손을 맞잡고 큰일을 한번 도모해보자. 중국에는 널린 것이 호구들이다. 우선 나는 항저우의 호구 하나를 물색해놓았다. 그렇지 않아도 예서 더 머물며 귀형을 배우고 싶었다. '불감청고소원(不敢請固所願)'이라. 나의 귀국을 만류하는 귀형의 호의에 심심한 사의를 표한다.”
“이 볼품없는 중국인의 정체는 뭐지? 동부지역 백인들도 영어를 이토록 현란하게 구사하기 힘든데. 눈빛이 예사 아닌 게, 어제 카지노에서 베팅한 돈의 몇십 배를 딸 때도 덤덤한 태도하며, 어쩌면 이 괴인은 전설적인 홍방의 두목일 수도 있겠다. 그게 아니라면 속임수 대마왕일 것이다.”
조폭 보스J는 생각에 빠져 액션을 잠시 망설였다.
마윈은 조폭 보스 J의 집중력이 떨어진 틈을 타서 몸만 빠져나가 공항으로 내뺐다. 창졸간에 귀국 비행기 티켓마저도 짐 속에 두고 나왔다. 수중에 가진 거라고는 여권과 카지노에서 딴 돈에서 택시비를 주고 남은 몇백 달러뿐. 중국행 비행기티켓을 살 수 없었다. 마윈은 국내선 터미널로 달려갔다. 아무 비행기나 제일 빨리 이륙하는 비행기를 타기 위해서였다. LA행 델타항공 여객기에 황급히 몸을 실었다.
그로부터 10여 년 후, 마윈은 한 인터뷰에서 당시를 회고하며 몸을 떨었다.
“그때 조폭 보스 J에게 꺼냈던 ‘인터넷’은 사실 그게 뭔지도 모르고 던진 미끼였다. 인터넷이라는 단어는 영어강사 시절 우연히 주워듣게 된 것이다. 당시 나는 인터넷이 컴퓨터 부품의 일종인 줄로 알고 있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조폭 보스 J는 부하들을 공항으로 보내 나를 발견하는 즉시 사살할 것을 명했다. 지금 생각해도 내가 그때 무작정 제일 빨리 이륙하는 여객기를 잡아탄 것은 현명한 판단이었던 같다. 한발 빨라 목숨은 구했으나 그때 라스베이거스에 두고 온 짐은 아직 구해내지 못했다.”
마윈은 LA에서 다시 시애틀로 날아갔다. 시애틀에 사는 친구를 만나 중국행 티켓을 살 돈을 빌리기 위해서였다. 친구는 시애틀에서 아주 조그마한 사업을 하고 있었는데 마윈은 그곳에서 처음으로 ‘진짜 인터넷’을 접했다. 친구가 마윈에게 무엇을 찾으려면 컴퓨터에 무엇을 입력한 후 엔터자판만 두드리라고 알려주었다. 그러면 모니터에 즉시 나타난다는 것이었다. 마윈은 ‘Beer’를 입력했다. ‘Beer’는 마윈 생애 최초로 인터넷에 사용한 단어였다. 금방 독일맥주, 미국맥주, 일본맥주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러나 중국맥주는 단 한 병도, 단 한 캔도 나오지 않았다.
“무슨 007영화 찍냐며, 아무리 내가 정색하고 이야기해도 곧이듣지 않겠지. 누가 믿어 줄까나.”
마윈은 시애틀발 베이징행 중국민항 CA 이코노미 석에서 앉아 라스베이거스, 카지노, 조폭 보스, 탈출, 인터넷으로 이어지는 거짓말 같은 첫 미국 여행길을 반추했다. 마치 자신이 '아라비안나이트' 속에 나오는 양탄자를 타고 과거와 미래, 실체와 가상세계를 넘나드는 것 같았다.
그로부터 20년 후, 2015년 9월 23일 미국을 국빈방문 중이던 시진핑 국가주석은 시애틀의 보잉공장을 찾아 연설하면서 중국민항 CA가 보잉기 300대를 구입하는 계약을 했다고 밝혔다. 그때 시진핑 바로 뒷줄 단상에 중국기업사절단 대표로 앉아있던 마윈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다시 20년 전으로 되돌아온 1995년. 귀국의 하늘길에서 마윈은 ‘알리바바와 40인의 도둑’ ‘신밧드의 모험’ ‘알라딘과 마술램프,’ 부와 권력과 미녀와 마법 등이 살아 움직이는 '아라비안나이트'를 방불케 하는 기발한 상상력의 실크 양탄자 한 장을 짜냈다.
지상의 천당, 항저우로 내려온 마윈은 곧장 주변의 친구와 제자들 모두 24명을 모았다. 자신의 상상력의 실크로 짠 실크 양탄자, ‘중국 최초의 인터넷회사’ 구상을 열성을 다해 설명했다. 하지만 대부분 “촌 사람이 미국을 한 번 갔다 오더니만 정신이 좀 이상해진 건 아닌가?” 면서 듣는 둥 마는 둥 했다. 한 제자만이 그게 뭔지 몰라도 한번 시험 삼아 해보고 안 되겠다 싶으면 금방 빠져나오면 어떠냐고 했다. 그러나 마윈은 우선 치고 달렸다(Hit and Run). 24명 모두 뒤따라 달렸다, 엉겁결에.
1995년 4월, 마윈은 여동생과 제부, 부모와 친척으로부터 2만 위안을 추렴하여 ‘하이보 인터넷’(海搏網絡)을 창업했다. 곧이어 뒤따라온 24명의 친구 및 제자들과 함께 ‘차이나옐로페이지’를 개설했다. 이것이 바로 각각 중국최초의 인터넷회사와 중국최초의 홈페이지 서비스 사이트 탄생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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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폭J 때문에 마윈은 자칫하면 아래 사진에서처럼 오늘날 중국인들에게 살아있는 재신으로 추앙받기는커녕 라스베이거스 후미진 뒷골목의 싸늘한 시체가 되거나 네바다 사막의 독수리의 밥이 될 뻔 했다.
그러나 인생지사 새옹지마라 했는데, 조폭J 때문에 마윈이 미국 땅을 처음 밟아보았고 인터넷하고 인연을 맺게 되었고 오늘날 글로벌 전자상거래시장의 슈퍼파워가 된 계기가 되지 않았을까.
지난 기억을 더듬어보고 자료를 다시 찾아보아도 상하이-항저우 고속도로의 늦은 개통의 원흉은 항저우 구간공사 투자 계약금을 떼먹은 조폭J임이 분명해 보인다.
1997년 11월 18일부터 상하이시 구간 48㎞는 개통되었으나 저장성 구간, 특히 항저우시 구간은 기공마저 않고 있었던 상황을 보아도 그렇다.
더구나 당시 중국은 상하이방의 거두 장쩌민 주석과 주룽지 총리시대였고 상하이 당서기는 저장성 출신 황쥐(黃菊)였으며 저장성 당서기는 상하이방으로 분류되는 현 전인대 상무위원장 장더장(張德江, 권력서열 제3위, 한족이지만 연변대학과 김일성대학을 졸업하여 유창한 한국어를 구사함)였다. 이러한 막강파워 권력실세들이 인구 유동량과 물동량이 가장 많은 상하이-항저우간 고속도로 건설을 미적거릴 별다른 이유는 없어 보인다.
1998년 12월 29일(화) 개통식이 거행되었다. 필자는 상하이와 저장성의 접경인 쑹장(松江)인터체인지 부근에서 거행된 상하이-항저우 고속도로 개통식에 참석했었다. 그날따라 끝없이 이어지는 양대 도시의 고위간부들의 상투조 연설이 무척 따분하고 지루하게 느껴졌다.
“어제 28일은 다수 중국인들이 한 달 중 최고의 길일(吉日)로 치는 날인데, 더구나 어제는 평일(월요일)인데, 왜 28일을 놔두고 29일에 개통식을 할까?”를 화두삼아 무료함을 달래기로 했다.
이런 시답지 않을 외인의 호기심을 풀어 줄만한 중국측 인사가 누가 있을까? 물색하던 끝에 마침 한정(韩正 )당시 상하이 부시장이 눈에 띄었다. 지금은 상하이 당서기 겸 당중앙정치국위원이라는 저 높은 곳에 임하여 있지만, 그때만 해도 그는 8명의 상하이 부시장 중 막내 제8부시장(우리나라 직할시 실국장급)으로 갓 승진한 최연소 부시장이었다. 원래 사근사근한 상하이남자의 특성에 더하여 상냥하고 너그럽고 겸손한 성품의 그와의 접촉에는 별 부담감을 느끼지 못했다. 한정은 특히 한국사람에게 친절했는데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누구라도 그러하듯 처음은 잘 잊히지 않는다. 고위 정관계 인사도 첫 관직, 특히 후일 승승장구의 기반이 된 첫 관직에 대한 애정은 각별할 것이다. 최초는 영원한 최고이니까.
1992년 한·중 수교가 되던 해, 한정은 처음으로 관직의 문에 들어섰다. 그의 첫 관직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 유적지가 소재한 루완구(盧灣區, 2011년 황포구로 흡수합병됨) 부구장(부구청장)이다. 한정은 1998년 가을 상하이 부시장으로 발탁될 때까지 루완구에서 6년간이나 부구청장, 구청장, 구 당서기로 재직했었다.
노태우 전 대통령(1992년 9월 30일)과 김영삼 전 대통령(1994년 3월 27일)의 상하이 임시정부청사 방문 시 인상적인 브리핑을 한 중국측 인사가 바로 한정이었다.
김대중 전대통령(1998년 11월 15일) 상하이 방문시에도 부시장으로 막 승진한 한정이 안내를 도맡았다. 한정은 한국의 고위인사를 제일 많이 만난 중국 고위 인사중의 하나다. 회고해보니 필자가 상하이 총영사관 영사로 부임하여 제일 처음 만난 중국측 주요 인사도 한정이었다.
상하이에 간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으레 임시정부청사 유적지를 방문한다. 특히 우리나라 정관계 고위인사라면 우선 참배해야 하는 곳이다. (간혹 청사 건물 바깥에서 인증사진만 몇 장 찍고 부랴부랴 골프를 치러가는 한심한 고관대작들도 있었다. 그런데 그들은 대개 끝이 좋지 않더라. 순국선열로부터 천벌을 받았을 것이리라.)
한정은 한국측 인사를 만날 때마다 진지한 표정으로 자신이 대한민국 독립운동의 성지가 소재한 구를 관할했었다고 자랑했다. 또 약간 장난스런 표정으로 자신의 성씨마저 ‘한국 한(韓)’이어서 한국과는 각별한 인연이 있다고 말하였다. 지금은 어떻게 변했는지 모르겠지만 한정은 상하이 4년여 체류시 필자가 접촉했던 모든 중국 인사중 대표적 지한파라고 꼽을 수 있다.
그날 나는 한정에게 부시장 승진은 '대붕이 붕정만리(鵬程萬里)의 큰 날개 짓'을 시작한거라며 앞으로의 무궁한 관운을 축원하며 물었다.
“왜 어제 길일 28일(1)*을 놔두고 29일 오늘 개통식을 합니까?”
그는 총기 넘치는 눈을 크게 뜨며 환한 미소로 답했다.
“오늘이 양력으로는 12월 29일이지만 음력으로는 11월 11일입니다. ‘11월 11일’ 저 쭉쭉 뻗은 고속도로 4차선 모양을 보세요! 영락없는 ‘11.11’ 형상이잖아요? 두 11 가운데 ‘.’은 중앙분리대고요”
탁! 전혀 예기치 못한 그의 답변은 나의 이마를 차갑게 때렸다. 기상천외한 발상과 그 실천에 머리가 멍했다.
“어제 더 중요한 행사가 있어 오늘로 미뤄졌다.” , “29일도 28일 못지않은 길일이다” 따위의 답변정도를 예상했었는데.
“11월 11일은 ‘11.11’ 고속도로 모양이라, 그러고 보니 정말 그렇군!” 상큼하고 앙증맞은 지적 쾌감을 준 한정에게 고마움을 표시하는 눈 인사라도 하고 싶었는데, 그는 시야에서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지금도 나는 고속도로나 중앙분리대가 있는 4차선 도로를 지날 때면 가끔씩 ‘11.11’의 추억이 떠올라 웃음 짓곤 한다.
개통식 사흘째 되던 날 1999년 1월 1일 신년 신새벽에 나는 그동안 교통체증으로 인한 마음체증을 풀려는 듯 상하이-항저우 고속도로로 차를 급하게 몰았다. 차량들이 거의 없어 고속도로는 마치 공항의 활주로 같았다. 그런데 한 가지 특이했던 부분이 있다. 도로 표지판이 10단위로 끝나는 게 아니라 18㎞, 38㎞, 58㎞, 88㎞ 식으로 적혀 있었다. 지금도 그대로인지, 아시는 분은 귀띔해주시길!
참고로 2015년 말 현재 세계고속도로 총연장 1위 국가는 중국 11만1950㎞으로, 고속도로 총연장 글로벌챔피언자리를 반백년 넘게 장기집권하던 미국 10만3027㎞를 추월했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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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1)*중국인에게 28은 둘이 부자로 잘산다는 의미로 읽히는 숫자이기에 매월 28일은 결혼일, 계약일, 개업일, 개통일, 기공일, 준공일, 상량일, 심지어 법령 제정일과 시행일로도 택일되는 길일이다.
(2)*http://www.abcnewspoint.com/top-10-longest-highways-in-the-world/
https://en.wikipedia.org/wiki/Highway 2015년 말 기준 한국의 고속도로 총연장은 5703㎞(세계 9위)로 우리나라 면적의 170여배나 넓은 러시아의 4500㎞(세계 10위)을 훨씬 추월하고 있다.
[참고서적]
강효백, 『중국의 슈퍼리치』, 한길사, 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