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문자 그림', 美의 민주화를 이루다

2016-08-09 1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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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의전당-현대화랑, 오는 28일까지 '조선 궁중화·민화 걸작 - 문자도·책거리'전 개최

예술의전당은 현대화랑과 함께 오는 28일까지 서예박물관에서 '조선 궁중화·민화 걸작 - 문자도·책거리'전을 개최한다. 사진은 삼성미술관 리움이 소장하고 있는 '호피장막도'[사진=예술의전당 제공]


아주경제 박상훈 기자 ="하나의 작은 병풍이지만 그 속에서 발견되는 제반 요소들이 조선인의 국가적 예술 전반에 걸쳐 그 기저를 이루는 자양분이 되고 있는 것이다. (중략) 나는 촛불을 끄고 잠자리에 누운 채 언젠가 나에게 '조선인 같은 야만인들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던 누군가의 어리석은 생각을 한껏 비웃으며 곤한 잠에 빠져들었다."

1898년 프랑스의 인류학자 샤를르 바라(Charles Varat)는 경상도 밀양에서 '문자 그림'이 그려진 한 병풍을 손에 넣고, 숙소에 누워 이처럼 평했다. 그가 구했던 것은 '문자도'(文字圖). 이는 한자 문화권인 동아시아에서 '수'(壽) '복'(福) 등과 같은 한자를 사물과 함께 그린 것으로, 특히 조선만의 독자적인 문자도는 '유교문자도'(儒敎文字圖)라 부른다. 다시 말해, 문자도는 문자를 축으로 그림을 그려 넣은 글자이자 그림인 셈이다. 
문자도에는 조선왕조 500년의 통치 이데올로기였던 '효제충신예의염치'(孝悌忠信禮義廉恥)’가 다 담겨있으며, 이 여덟 가지 문자의 서체와 여기에 결부된 옛날 이야기를 '문자 그림'이라는 조형언어로 재해석한 것이 특징이다. 
 

문자도 ⓒ현대화랑[사진=예술의전당 제공]


예술의전당(사장 고학찬)은 현대화랑(회장 박명자)과 함께 오는 28일까지 서예박물관에서 '조선 궁중화·민화 걸작 - 문자도·책거리'전을 개최한다. 

'책거리'(冊巨里)는 서가(書架) 없이 책, 도자기, 청동기, 문방구, 화병 등을 함께 그린 그림을 일컬으며, 동서 문화를 지식으로 잇는 '책 길'(bookroad)라고 불릴 만큼 국제적인 면모를 가진 그림으로 평가 받고 있다. 

이번 전시에는 조선시대 문자도와 책거리 58점을 선보인다. 국립중앙박물관, 삼성미술관 리움 등 한국을 대표하는 국공립·사립 박물관과 화랑, 개인 등 20여 곳의 걸작이 한자리에 모이는 것은 우리나라 전시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다. 
 

책가도 ⓒ국립중앙박물관[사진=예술의전당 제공]


정조는 1791년 어좌 뒤에 놓인 '책가도'(冊架圖·책거리의 일종으로 서가에 문방사보 등 다양한 기물을 그린 그림)를 가리키며 신하들에게 "경들은 보이는가? 이것은 책이 아니고 그림이다"고 할 정도로 '책 정치'를 펼치기도 했다. 이처럼 궁중에서 불어닥친 책거리 열풍은 일제강점기까지 이어지며 양반사회는 물론이고 민간에까지 대거 유행하게 됐다. 

문자도와 책거리는 조선후기부터 출세와 신분세탁, 지적허영 등을 충족하는 수단으로 활용됐다는 점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현실은 탐관오리의 학정으로 민란이 곳곳에서 발발할지언정 꽃이 피고 봉황새가 날아드는 병풍 그림과 같은 세상을 꿈꾸었던 사람들 그리고 도자기, 문방구, 안경, 화병 등 당시 조선의 부자지식인들만 소유할 수 있었던 진귀한 물품들에 대한 욕망을 간접적으로나마 풀고 싶었던 사람들에게 문자도와 책거리는 안성맞춤이었다.

이처럼 문자도와 책거리는 조선의 사회상을 투영하는 중요한 기제였지만, 정작 우리 서화미술 역사와 주류 미술사에서 철저히 망각·배제된 존재였다. 그림 그린 사람을 모른다는 이유로 작품을 격하하는 등 민화의 가치를 지배계층 기득권의 시각으로 바라보거나 여전히 서구미술의 잣대로 평가하려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책가도 6곡병 ⓒ삼성미술관 리움[사진=예술의전당 제공]


하지만 일본 미학자 야나기 무네요시(1889~1961)가 "(조선민화는)하늘에서 떨어진 그림같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독특한 미지의 미의 세계가 있다. 이 그림이 세계에 알려지는 날이 오면 세상은 큰 충격에 빠질 것"이라고 말했을 정도로 문자도와 책거리는 세계 보편의 조형언어와 메시지를 내장하고 있다. 

특히 책거리는 조선후기와 말기 '북학'(北學)으로 통칭되는 실학의 흐름을 반영해 입체적이고 사실적으로 사물을 표현하며 뛰어난 현대감각과 색채감을 갖춘 작품으로 평가 받고 있다. 

이번 전시에서 또 한 가지 눈여겨볼 대목은 바로 '전통의 색'이다. 전시장 2층에서는 국내에서 생산되는 천연석채(天然石彩), 천연토채(天然土彩) 등의 전통안료와 오방색의 원료가 되는 천연 유색광물 등의 자료를 만날 수 있다. 천연석채는 중국, 일본을 통해 서구의 화공안료가 국내 유입되었던 19세기 이전에 천연 유색광물을 연마·수비해 만들었던 전통안료다.

일제강점기 이후 국내생산이 단절되었던 것을 10년이 넘는 연구 끝에 비법을 되찾아 복원생산 하고 있는 '가일전통안료'의 김현승 대표는 "수억 년의 시간 동안 형성된 천연광물의 색은 국경을 초월해 공감하는 색감인 동시에 가장 한국적인 채색"이라며 "조선 정조의 정책적 장려에 의해 그려진 책거리는 조선 장식화, 기록화와 더불어 특히 천연석채 작품이 많다"고 설명했다. 
 

서예박물관 2층에서 만날 수 있는 '전통의 색' 초대전.[사진=가일전통안료 제공]


한편 전시기간 중 매주 토·일요일에는 오후 2시부터 4시까지 서예박물관 1층 메인 로비에서 한국민화협회 작가와 지도교수들이 '만화그리기 교실'을 진행한다.

전시가 끝나면 올 9월부터 12월까지 뉴욕 스토니부룩대 찰스왕센터를 시작으로 캔자스대 스펜서박물관(내년 3월부터 5월까지), 클리블랜드미술관(내년 7월부터 9월까지) 등으로 전시를 이어갈 예정이다. 문의 02-580-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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