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이 없는 새까만 태초, 유동하는 우주, 물 위에 떠오른 달. 이 모든 것은 나무, 꽃, 바람, 산을 닮았다. '물과 바람이 그린' 그림들이어서 그럴까. 칠흑 같은 태초, 소용돌이 치는 은하를 지나, 도달한 달의 고요함은 봄, 여름, 가을, 겨울로 이어지는 자연의 순리를 상기시켰다. 우주의 탄생, 자연의 순환, 예술에 천착한 노승의 삶의 여정이 한 공간에서 펼쳐졌다.
"물로 흘리고 바람으로 날렸다"
최근 찾은 '성파 선예 특별전-COSMOS'는 빛도 물질도 생기기 전인 새까만 무(無)의 상태가 관람객을 맞았다. 삼베와 옻칠만으로 완성된 ‘태초’는 마치 불에 새까맣게 탄 나무 기둥처럼 보였다. 그러나 '태초'는 고요한 어둠 속에서도 생명의 진동을 일으키며, 새로운 탄생의 순간을 움트고 있는 듯했다. 모든 것의 끝이자, 모든 것의 시작이었다. 두드리면 ‘쾅쾅’ 소리가 날 정도로 강력한 ‘태초’의 힘은 무아지경의 옻칠에서 나왔다. “옻칠할 땐 아무 생각이 없어진다”는 성파 스님은 전통 직물인 삼베에 옻을 칠해 모양을 잡고, 다시 무수히 옻을 덧칠하는 반복의 과정을 통해 삼베에 생명력을 불어넣었다. 그는 “빳빳할 때 형태를 잡아야 한다”며 “클수록 견고해야 해, 여러 겹으로 한다. 천을 한 겹 붙이고 칠을 하고, 마른 후 또 칠하면 단단해진다”고 했다.
그의 예술활동은 '나를 비워내는 과정'이다. 무수하게 칠하고 깎아내는 과정을 통해 옻의 맑은 본성이 드러나듯, 스님은 예술을 통해 자아를 초월한 물과 바람이 그려낸 세계를 표현했다. 그는 지난 9월 27일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유동에 전시된 한지에 옻칠한 작품들을 가리키며 “이건 물과 바람이다”라고 말했다. “칠한 게 아니다. 난 붓으로 그리지 않는다. 붓으로 그려서는 이래 안 나온다. 색을 쏟아붓고 바람 부는 곳에 두거나, 기울기도 하고 흘려내리기도 했다.”
유동의 작품들은 물과 기름이 서로 밀어내는 성질을 응용한 것들이다. 식물성 유지인 옻에 안료를 섞어, 옻이 물과 바람이 그리는 흐름을 따라가도록 놔뒀다. 이 작품들을 보니, 거대하게 회전하는 은하에서 퍼져 나오는 빛 혹은 푸른 산이 단풍으로 울긋불긋하게 물드는 사계절의 변화가 떠올랐다.
평상시가 도…“도자는 깨져도 흙으로 안 돌아가”
성파 스님은 자신의 작품은 ‘작품’이 아니라고 했다. 그에겐 평상시가 도다. “짬이 날 때 이것도 저것도 하다가 그렇게 하다 보니 이런 것이 나왔다. 그냥 내 생활 속에서 하는 일이다. (작품은) 삶의 하나의 발자취라고 생각한다. 산에 나무도 많이 심었다. 전시를 못 해서 그렇지.”특히 스님은 조물에 전시된 도자를 보면서 부처와 중생을 얘기했다. “도자라는 것은 형태를 만들기 전에는 미세한 먼지다. 한주먹만으로도 몇 개인지 말할 수 없을 정도의 미분이다. 이걸 한 덩어리로 만들기 위해서는 물을 타야 한다. 먼지인 흙과 물을 결합해서 형태를 만든다. 그냥 두면 흙으로 돌아간다. 굽고 유약을 발라야 도자기가 된다. 초벌구이를 하면 흙으로 돌아간다. 재벌구이를 하면 깨져도 흙으로 안 돌아간다. 중생이 깨치면 부처가 된다. 중생이 부처가 되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이란 걸 깨달았다. 그것을 사람들에게 보이려는 것이다.”
특별전은 성파 스님의 10대부터 80대까지의 작품들을 총망라한다. 이를 통해 시서화를 시작으로 불교의 사경과 도자, 추상적인 옻칠 예술로 확장되는 그의 예술적 여정을 함께 걸을 수 있다.
이동국 객원큐레이터 겸 경기도박물관장은 “(지금의 작품들은) 10대 시절의 시서화를 시작으로 도자, 염색, 칠, 산수화 등 모든 것이 총체로 쌓여 있는 결정체”라며 “전혀 다른 세계가 지금도 나오고 있다”고 말했다.
전시는 오는 11월 17일까지 예술의전당 한가람디자인미술관에서 열린다. 관람료는 무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