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당 이활의 생애-28]무역협회 출범, 초대회장에 상산 김도연

2016-07-06 1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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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경제신문-한국무역협회 공동기획 (28)

제2장 재계활동 - (23) 무협 상무이사

목당 이활 한국무역협회 명예회장[일러스트=김효곤 기자 hyogoncap@]


아주경제 채명석 기자 = 재계인(財界人)으로서 일찍 재계활동에 나선 인사는 뭐니뭐니해도 우계(友溪) 전용순(全用淳, 1901~196년)이었다. 그는 1940년대 들어와 민족자본계 실력자로 등장하여 몇 안 되는 경성 상공회의소 의원으로 당선되었다. 당시의 의원은 이동선(李東善) 이정재(李定宰) 전용순 변상호(邊相昊) 김규삼(金圭三) 김연수(金秊洙) 등 6명이었는데, 이동선은 약업계(藥業界)를 이끌었던 조선무약(朝鮮賣藥)의 사장이며 전용순은 금강제약(金剛製藥)의 사장으로 이들은 인척 관계에 있었다. 이정재는 영보합명(永保合名) 그룹의 민씨(閔氏) 가문을 대표한 인물이다. 태평양전쟁 말기의 민족자본을 대표한 것은 영보합명 그룹의 민씨들, 경성방직(京城紡織)의 김연수, 화신산업(和信産業)의 박흥식(朴興植), 태창직물(泰昌織物)의 백낙승(白樂承), 약업계의 유일한(柳一韓), 전용순으로 압축해 볼 수 있다. 그런데 이 가운데 전용신 이동선이 해방 직후의 재계 재편성 작업을 담당하고 나섰다.

우계는 미군정이 실시되면서 1945년 10월 군정장관 고문으로 임명되었는데 고문단은 11명으로 구성되었다.
김성수(金性洙) 전용순 김동원(金東元) 이용설(李容卨) 송진만(宋鎭萬) 김용무(金容茂) 윤기익(尹基益) 여운형(呂運亨) 조만식(曺晩植)이었으며, 평양에 있는 조만식은 참석하지 못했고 인촌(仁村)이 고문회의 의장에 선출되었다. 군정의 고문도 그 해 12월에 군정청이 한국인·미국인 두 국장제(局長制)를 취하게 되면서 유야무야되고 말았지만 이미 이때 우계는 정계에 발판을 구축하면서 독자적인 재계 발언권 장악을 시도하고 있었다.

대한상의(大韓商議)가 다시 창립된 것은 1946년 5월 19일이었으며 초대회두(會頭)에 민규식(閔奎植)이 취임했다.

민규식(1950년 납북)은 영국 런던대학 출신으로 미군정청으로부터 상의(相議) 설립을 위촉받아 참모로 이정재, 전용순, 이동선 등을 규합해서 조선상공회의소를 발기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때 우계는 부회두(副會頭)로 취임하면서 상의를 실질적으로 이끌었다. 당시 미군정의 광공국장(鑛工局長)으로 있던 오정수(吳禎洙, 1899~1988년)가 과도정부 상공부장으로 눌러앉아 있었다.

한국무역협회(韓國貿易協會)의 창립은 1946년 7월 31일이었다.

당시 정국은 미·소공동위원회에서 미·소간의 주장이 맞서 처음부터 근본적인 의견 대립을 보이는 가운데 독립노선(獨立路線)이 혼미를 거듭할 때이다. 미·소공동위원회는 1946년 3월 20일부터 덕수궁 석조전에서 열렸는데, 이에 앞서 미군정은 우익진영의 비상국민회의의 독자적인 활동을 견제하고 앞으로 열릴 미·소공동위원회의 협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기구로 민주의원(民主議院)을 발족시키고 있었다.

의장에 이승만(李承晩), 부의장에 김구(金九), 김규식(金奎植)을 추대하고 발족한 민주의원은 일단 발족을 보자 미군정의 자문기관의 선을 넘어 정권 인수를 위한 국민대표기관으로 체제를 갖추게 되었는데 상산(常山) 김도연(金度演)은 민주주원에서 경제정책 입안(立案)을 도맡아 광범위한 활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한편 미군정은 과도정부를 설치하고 안재홍(安在鴻)을 민정장관(民政長官)으로 내세우고 있었다.

이런 가운데 미군정은 재계 편성을 촉구하여 조선상공회의소를 창립시켰고 무역협회의 창립은 상의에 위촉하였다. 상공부장 오정수의 권고를 받은 상공회의소는 김용주(金龍周) 이정재 등이 우계가 무역협회 회장으로 나설 것을 권했는데, 우계는

“글세, 내가 영어를 할 줄 알아야지! 영어에 능한 사람이어야 할 거요.”

이래서 인사가 보류된 채 6월 24일 무역협회 창립준비위원회가 발족되었다. 준비위원의 얼굴은 전용순 이동선 주요한(朱耀翰) 김승식(金承植) 장기창(長基昌) 황태문(黃泰汶) 유명한(柳明韓) 윤우식(尹宇植) 김인형(金仁炯) 김항변(金恒變) 등 상의 의원들이었다. 이때만 해도 무역협회 회장의 지명을 보지 못했다. 7월에 들어서서도 무역협회 창립 업무는 진전이 없었다. 그런데 과도정부로선 사태가 급했다.

인천항엔 만주, 북지 방면에서 일군(日軍)이 남기고 간 전쟁 물자를 털어 적재하고 들어오는 정크선이 운집해 있었고 당황하는 형편이었다. 우선 다급한 대로 7월 4일 외국과의 교역통제령(交易統制令)을 발표하고, 7월 11일 상무부에 무역국 및 상무국을 설치, 7월 18일 관세, 세관법 관계를 재무부 제1조사과에서 관장토록 했고, 그제서야 법석을 떠는 행정부였던 것이다. 그나마도 여기에 손발이 안 맞아 업계 단체 결성마저 지체되고 있었다. 당황한 상무부(常務部)는 상공회의소에다 대고 무역협회의 창립을 재촉했다. 준비위원회가 결성되고, 그들이 결정할 문제는 협회를 이끌어갈 회장을 추대하는 일이었는데, 지연되던 끝에 지명한 사람이 상산 김도연(이었다.

미국 아메리칸 대학을 나온 상산은 귀국 후 한 때 연희전문(延禧專門)에서 교수생활을 하다가 종전 직전에 종로구 인사동에다 흥업사(興業社)라는 간판을 걸고 조그마한 개인 장사를 벌이던 끝에 해방을 맞았다. 서울 토박이로 우계와는 한국민주당 총무가 되면서 자주 얼굴을 대하던 사이였다.

상산은 김우상(金佑祥) 손봉조(孫奉祖) 이순택(李順澤) 홍성하(洪性夏) 나용균(羅容均) 등 일련의 경제전문가로 자처하는 인물 가운데서는 가장 선망이 높은 한국민주당의 중진이었은즉 그의 지명에는 누구도 이의가 있을 리 없었다.

그러나 상산은 아무 준비도 없이 창립총회에 임하게 되었다. 그는 우계로부터 무역협회 회장 자리를 상의받고 얼핏 동반자로 떠올린 사람이 목당(牧堂) 이활(李活) 이었다는데, 목당은 그간 한국민주당에 가담하면서도 어떤 직책을 맡지는 않은 채 다만 경제 분야의 일을 돕는 정도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다. 민주의원이 설립되고 한국민주당 소속으로 의원에 선출된 목당은 상산과 같이 특별경제위원회에 배정되어 있을 정도였던 것이다.

목당은 일찍이 런던 대학에서 경제를 전공하는 동안에도 언제나 영국과 한국을 비교하는 입장에서 강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던가. 영국의 국토가 우리 배밖에 안 되는 작은 섬나라이면서 세계를 재패할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5대양 6대주를 누비는 무역을 통해서였던 것을 간과하지 못할 리 없는 목당은 언젠가 국권이 회복되는 날엔 나라를 발전시킬 수 있는 길로서 해외 무역을 진흥시키는 무역입국론(貿易立國論)을 신념으로 굳히고 있던 터였다.

상산과 같이 민주의원에서 경제정책 입안 작업을 담당하게 되자 그는 평소의 소신대로 무역입국론을 강력히 폈다. 우선 재계의 의견을 통합하기 위한 대외 무역 민간단체의 설립이 시급하다고 했고, 상산도 목당의 그런 주장에 전폭적인 동의를 해주었다. 그러므로 상산이 우계로부터 무역협회 회장으로 협회 설립을 종용 받았을 때, 무역입국론을 내세우며 협회 설립을 주장하던 목당을 상기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렇게 하여 목당은 상산의 동반자로서 무역협회 상무이사로 취임하게 된다. 그간 우계가 창립준비위원회 일을 혼자 도맡아 처리해 주었으므로 상산과 목당은 우선은 그가 마련해놓은 무대에 출연하여 임원진의 의사를 쫓아 협회를 운영해 가면 되었다.

하지만 목당으로선 재계 사람들과 생소한 사이였다. 창립총회는 7월 31일 하오 2시 조선 상공회의소 회의실(을지로입구 전 식산은행(殖産銀行) 별관)에서 있었다. 창립총회라고 하지만 상무부를 대표하여 최만희(崔萬熙) 무역국장이 참석했고 상공회의소 의원들까지 합쳐 모두 43명이 참석한 그런 총회였다. 이날 선임된 임원은 다음과 같았다.

회      장      김도연
상무이사       이  활
비상근회장   전용순(상의부회장)
                 김인형(대한상사사장)
이     사       강석천(한국물산)
                 김용완(경성방직)
                 김익균(건설실업)
                 박병교(화신무역)
                 유일한(유한양행)
                 장기식(동화산업)
                 주요한(상호산업)
감     사      황청하(남성물산)
                 구용서(조선은행이사)
                 김용주(조선우선사장)

이들 임원진 가운데 목당이 아는 유일한 인물은 동은(東隱) 김용완(金容完, 1904~1985년)이 있을 뿐이었고, 상산과 우계를 빼면 모두 초면의 인물들이었다.

동은은 인촌의 매부로 목당과는 겹사돈이 된다. 그는 일본 히로시마 고등사범학교(廣島高師)를 나와 교사가 되려다 수당(秀堂) 김연수(金秊洙, 1896~1979년)의 사업을 돕게 되어 해방 후에는 경성방직 사장직에 있는 인물로 목당과는 허물없이 지내는 처지였다.

그러니까 목당은 완전히 낯선 재계에 뛰어든 것이나 다름없었다. 돈을 버는 일과는 담을 쌓아온 목당으로선 이익 추구를 목적으로 하는 경쟁 사회단체에 적응해 갈 수 있을 것인지 겁이 안 나는 것도 아니었다. 그리고 재계단체(財界團體) 운영자로서 어느 정도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며 보람을 찾을 수 있을 것인가도 의문이었지만 다만 정계에서 벗어나 재계로 활동무대를 옮겼다는 것은 평소 바라던 바였고 문제는 어떻게 앞으로 처신할 것인가만 결정하면 될 일이 아니겠느냐고 스스로에게 타이르는 목당이었다.

하루는 인촌을 만났는데,

“이 사람, 겨우 한다는 게 장돌뱅이 모아다 놓구 돈벌이하자는 거요? 이런 호화스러운 자가용이나 몰자는 거고?”하고 논을 걸어왔다.

“아닙니다. 이런 차 타자는 게 아니구···”

목당은 정색을 하면서 또다시 무역입국론을 펴려는데 인촌은 손을 내저으면서,

“알았어요, 알았다니까.”

하곤 껄껄 웃어대는 것이었다. 그건 그렇고, 창립총회를 끝낸 자리에서 임원들은 인사를 교환하기 바쁘게 약속이나 한 듯이 상공회의소의 우계 사무실로 몰려갔다. 이날의 주인공은 상산과 목당이었고 우계는 주인답게 일일이 임원진 한 사람 한 사람을 소개해 나갔다.

임원으로 선임된 사람들은 협회 창립에 주축 역할을 했던 사람들로, 그들 간에는 구면이었지만 졸지에 지명을 받고 나온 상산과 목당은 모든 것이 생소할 뿐이었다. 참고로 이날 모인 주요 인사들을 소개한다면 다음과 같다.

우선 우계 전용순은 앞서 말한대로 무역협회 창립 주역으로 목당보다 두 살 위에 불과하지만 노련한 재계 실력자였다. 그는 상공회의소 부회두로 취임한 지 두 달 남짓밖에 안된 상태였는데도 이미 재계 원로들을 자기 지지자로 만들어 임원진을 자기 사람들로만 굳히어 상의를 온통 자기 기반으로 구축하고 있는 백전노장(百戰老將)의 그런 인상이었다. 그런가 하면 김인형 부회장은 대외 무역의 베테랑 가운데서도 실력자로 선출된 인물이었다. 그는 도쿄상대(東京商大) 출신으로 미쓰이물산(三井物産) 경성지점에 근무하다가 해방을 맞자 독자적으로 무역업에 뛰어든 사람으로 우계와는 또 다른 타입의 신상(紳商, 대상인) 같은 호감을 주는 인물이엇다.

김익균은 30대의 젊은이로 이사에 선임되었는데, 작달막한 키에 지성적인 냄새를 한껏 풍기는 실업가로서 활동 폭이 넓고 정보통으로서 노실업가(老實業家)들도 그 능력과 수단을 인정하는 패기만만한 인물이었다.

김용주는 훤칠한 키에 세련된 풍모가 함부로 다룰 수 없는 위엄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포항을 무대로 폭넓은 상업활동을 하다가 해방 후 중앙 무대로 진출하여 해운업에 꿈을 걸고 조선해운건설협회를 창설하여 회장에 취임하고는 벌써 재계에 두각을 나타내 감사로 취임하고 있었다. 그는 상의의 상임위원이기도 했는데 상의 안에서의 서열도 민규식 유일한 이동선 김용주 김항변 최두선 다음으로 손꼽히고 있었다.

주요한은 젊었을 때는 이 나라 신문학 초창기의 뛰어난 시인(詩人)으로 이름을 떨친 인물이었는데, 실업계에 투신한 이래 해방이 되자 무역업 간판을 걸고 나섰으며 기성 보수자본계(保守資本界)에서는 인정하는 인물이었다.

아무튼 목당이 이날 받은 임원진에 대한 인상은 상의의 분신이라는 그런 느낌이었다. 상산과 목당은 이날 상산의 사무실인 화신백화점(和信百貨店) 4층 민주의원 특별경제위원회 위원장실로 돌아와 앞으로의 일을 의논했다.

“우선 사무진용을 갖추는 것이 급한데 출근하면서 한 사람 한 사람 갖추어 나가십시다. 쓸만한 사람이 있으면 천거하세요.”

상산은 개인사업을 해본 경험에서 인지 차근차근한 데가 있었다.

“당장 한 두 사람 있어야 될 텐데요.”

하고 걱정하는 목당에게,

“같이 일할 사람이 한 사람 있습니다. 식산은행에 있던 사람인데 지금 내가 연구위원으로 데리고 있어요. 나익진(羅翼鎭)이란 젊은이인데 우선 우리 셋이서 하면서 부서를 짜나갑시다.”

목당은 실무 책임을 맡은 상무이사였지만 백지상태였다. 다만 총회 전날 상산이 준 정관초안을 뜯어보아 상무이사가 해야 할 일을 파악하는 데 그쳤을 뿐, 구체적인 것은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협회 운영의 경비는 통상회원(通常會員)으로부터 징수하는 회비로 충당되는데, 당장 소요되는 사무비를 어떻게 할 것인지 준비위원회에 기금이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그런 것을 일일이 상산에게 물을 일도 아니었다. 기획관리, 총무, 경리, 조사 할 것 없이 우선은 모두 목당 자신이 알아서 처리해야 할 일이었다. 막막하기만 했지만 모든 것은 시간이 해결해 줄 일이지 서두를 형편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는 사회생활을 하는 나름대로의 좌우명을 가지고 잇었다.

공즉불모(恭則不侮, 공손하면 뉘우치지 않으며)
관즉득중(寬則得衆, 너그러우면 사람들이 따른다)

요컨대 목당은 모든 일에 대범하게 처신하는 것을 철학으로 삼은 것이다. 그런 그였으므로 그는 당연히도 무보수로 봉사할 것을 결심하고 나섰다. 그리고 후회될 행동을 저지르지 않도록 수신할 것도 다짐했다.

실상 목당은 한국무역협회 회장으로 종신했지만 협회로부터 보수를 받은 일이 없더. 그렇다고 별도의 수익사업을 갖고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그는 협회 활동을 천직으로 알고 거기서 보람을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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