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경제 채명석 기자 = 신생 조국의 역군을 자처하고 정계로 뛰어 나온 인사들 가운데 경제입국(經濟立國)에 대해 관심을 보인 일부 사람들이 있었다.
한국민주당의 강령, 정책을 정하는 과정에서 김도연(金度演) 박용희(朴容喜) 홍성하(洪性夏) 라용균(羅用均) 등 일련의 인물들이 바로 그들인데, 그들은 나라경제의 향방을 다루면서 공업의 재편성, 주요 산업의 통제관리와 토지제도의 합리적 재편성 등의 문제를 제기하였을 뿐 체계적이고 조직화된 정책을 제시하지는 못하였다. 말하자면 경제에 관한 한 해방 조국은 정책 부재 상태였고 경제사회는 혼란의 소용돌이 속에 빠져있었다고 하겠다.
이와 같은 작업은 물론 법에 의하여 질서있게 진행되어야 했지만 사태는 그렇지 못했다. 일제 식민지 정치로부터의 해방은 정치의 공백을 불가피하게 만들었고, 행정력이 마비되어 있는 마당에 연고권에 의한 분업구조의 불균형과 38선이 가져온 자원(資源) 분단(分斷)이었다. 농업 부분으로 보면 북한에서 생산되는 질소비료에 전적으로 의존해야 되었고, 공업 부문은 북한에서 공급되는 전력과 석탄에 의존해야 하는 실정이었던 것이다.
1948년 5월 14일 북한으로부터 전력 공급이 끊어진 뒤 남한 산업은 그 전날의 절반 수준으로 생산이 떨어졌다는 통계만 봐도 그 사정은 짐작하고도 남을 것이다.
우리 경제는 미국 원조물자와 구호물자로 겨우 연명해가야 되는 실정이 되고 말았다. 귀속재산의 쟁탈전과 민간기업의 형성, 미국의 구호 원조라는 3중 구조 아래 우리 경제는 소용돌이 속을 정신없이 표류하고 있었던 것이다. 특히 해방 후 한국 경제 재건을 위해서는 적산업체의 적절한 관리 운영이 그 요체가 되었으나, 실제로 이에 대한 연구는 전무한 실정이었다. 적산 취급에 대한 미군정의 기본방침이 불투명했던 것도 따지고 보면 우리네 스스로가 이에 대한 대비책을 전혀 못 가졌던 데서 연유한 것이었다.
일제는 1937년 중일전쟁을 개시, 15년 전쟁 동안 한국에서 모든 물적 인적 자원을 동원하기에 혈안이었고 그에 따라 우리들은 가쁜 숨을 몰아쉬기에만 바빴다. 자기상실과 사상의 공백기를 15년 세월 동안 겪고 느닷없이 맞은 광복이었으니 어쩌면 그것은 어쩔 수 없는 혼란이었는지 모른다. 국권(國權)을 되찾기는 했지만 이를 수용할 태세를 전혀 갖추지 못한 상태였으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