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경제 채명석 기자 = 경상북도 영천은 경주와 대구를 같은 거리에 둔 중간 지점으로, 문화권으로는 옛 신라 문화에 속하고 경제권으로는 대구권에 속한다. 이 지역은 또한 금호강의 원류 지점으로 선사시대부터 사람이 주거를 한 흔적이 있고 고대로 내려와서는 골벌소국(骨伐小國)이란 부족국가가 섰던 곳이기도 하다.
목당(牧堂) 이활(李活)의 출생지인 임고면(臨皐面) 양항동(良巷洞)은 신라 경덕왕 때는 임고군(臨皐郡)에 속해 있었는데 오랜 삶의 터전이었다고는 해도 역사상 큰 인물이 배출된 곳은 못되고, 독자적인 문화권도 형성하지 못했으며 큰 부호가 나지도 않았다. 그것은 물론 바닥이 워낙 협소했던 데서 연유한다고도 할 수 있겠는데, 이중환의 ‘택리지’에 봐도 ‘안동에서 남쪽으로 한수를 건너면 팔공산이 있다. 산 북쪽 한수 남쪽에 의성 등의 여남은 고을이 있다. 그 동남쪽은 경주이다’라고 하여 영천에 대해서는 언급도 하지 않고 있으며, 다만 ‘여남은 고을’이라고 한 중에 영천은 의성, 의흥과 함께 큰 고을의 하나에 들어가는 정도이다. 이때만 해도 경주에서 서울로 가는 교통로는 두 갈래가 있어서 그 하나는 경주-영천-의흥-의성-영주-제천-원주-양주-서울이고, 또 다른 하나는 경주-영천-의흥-안계-상주-문경-충주-여주를 거쳐 서울에 이르는 길이 그것이었다.
이런 지형과 지세로 보아 영천 지방은 먼 옛날 부족사회가 생성되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할 것이다. 산으로 둘러싸여 있으므로 방어하기가 쉬웠을 것이고, 수리가 또한 좋으므로 농경에 적합했을 것임은 쉽게 짐작할 수 있는 일이 아닌가. 그래서인지 이 고장에는 일찍부터 사람들이 모여들어 살기를 좋아했다. 다만 좁은 것이 이 고장이 크게 번창할 수 없었던 한계가 되었다고나 할까.
목당 집안만 하더라도 소위 영천 4대 성씨 가운데 하나인 영천이씨(永川李氏) 문중으로 24대를 이어 영천에서 살아온 집안으로, 이미 고려 중엽에 이 고장에 자리를 잡고 정착한 집안인 것이다. 하지만 이 작은 고을에서 마침내 만석꾼 부자가 배출된 것은 목당의 선친 석와(石窩) 이인석(李璘錫)의 대에 와서 처음 이룬 위업이었다. 일제의 지주옹호 정책에 힘입은 이례적인 현상이었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어쨌든 그 전까지는 부자라야 천석꾼이 고작이었던 것이다.
또한 이곳 영천의 향교를 살펴보면 1502년에 건립되었으나 1570년에 불타고 현존하는 것은 그 뒤인 조선 광해군 때에 다시 수축한 것으로, 8동 36간의 그리 크지 않은 규모의 향교가 지방문화재로서의 보호를 받으며 남아 있다. 영천이 자랑하는 인물이라면 고려 말 이후에 와서 배출되는데 동방리학(東方理學)의 원조인 대학자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를 비롯하여 예조판서(禮曹判書) 조신충(曹信忠), 보문각(普門閣) 대제학(大提學) 이석광(李釋光)·박보록(朴普祿), 밀직부사(密直副司) 이자용(李子庸), 공조판서(工曹判書) 정광후(鄭光厚), 대중(待中) 김보일(金普一 ), 병조판서(兵曹判書) 이강(李康) 등을 들 수 있으며 그 뒤 조선조에 와서는 양관(兩館) 대제학(大提學)을 지낸 서거정(徐居正)이 이 고장 출신의 역사적 인물이다.
그 가운데 정몽주의 모부인(母夫人)이 바로 영천이씨로, 태중에 난초 화분을 안고 가다가 넘어진 꿈을 꾸고 포은을 낳았다는 일화가 남아 있으며 그의 생가가 바로 목당의 출생지와 같은 우항동(현재의 양항동)으로, 마을 뒷산 기슭에는 지금도 임고서원(臨皐書院)이라는 작은 서원이 남아 그 내력을 말해 주고 있다.
영천을 특징짓는 또 다른 것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영천 큰 장일 것이다. 속담에 ‘영천 장에 콩 팔러 간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전국의 크고 작은 장 가운데서도 영천 장은 물건 거래 활발하고 멀리서부터 장꾼들이 꾀어들고는 했는데, 특히 콩이 많이 거래되어 그런 속담이 생기게 된 것이다.
한편 ‘영천 장에 콩 팔러 간다’라는 말에는 ‘위험한 일을 한다’, 심지어는 ‘죽으러 간다’는 뜻도 포함되어 있는데, 그것은 안동이나 포항·영일 지방으로 가는 길에는 시티재가 있고, 입암(立岩)이나 죽장(竹長)으로 가는 길에도 보현산의 준령이 있는가 하면 청송 방면으로는 노귀재, 군위와 의성 방면으로는 갑티재, 달성과 칠곡으로 가는 길에는 은해사(銀海寺) 일대의 팔공산 준령, 경산으로 향하는 길에는 채약산과 구룡재가, 그리고 청도로 가자면 상동재를 넘어야 하기 때문에 생긴 말인 것이다. 즉 이처럼 사면팔방으로 험준한 산에 둘러싸여 있어서 세상이 어지러운 때에는 이들 준령의 재에서 도적 무리들이 출몰하면서 영천 장에서 콩을 팔고 돌아가는 장꾼들의 주머니를 털고, 심지어는 살인까지 하였던 것이다.
하여간 영천 큰 장은 대구 약 시장, 안동 시장과 함께 경상북도의 3대 시장의 하나였다. 영천 장이 번창한 것은 교통의 중심지라는 데 있었다. 각 지방으로 연결되는 요충지로서 경주에서 서울에 이르는 중요 지점이기도 하지만 교통수단이 불편했던 당시에 1일 경제권을 이루는 중심지가 바로 영천 장이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동해안 일대에서, 수산물까지도 영천 장으로 와서 군위·의성·안동·칠곡·선산·달성·경산 방면으로 실려 나갔으며 대신 이들 지역의 농산물과 면직물, 약초 등이 이곳 영천 장을 통해 동해안으로 팔려갔다.
‘잘 가는 말도 영천 장, 못 가는 말도 영천 장’이란 속담도 이 지방에 있는데 이는 가까운 각 고을에서 장을 보러 가자면 빨리 가든 늦게 가든 영천 장 아니면 갈 곳이 없다는 데서 나온 말이다.
‘영양지(永陽誌)’에 따르면, 이 고장에서는 특히 봉밀(蜂蜜, 꿀)·완초(莞草, 왕골)·인삼·버섯·대마(大麻)·산약(山藥) 등의 특산물이 생산되었다고 쓰고 있다.
그러나 뭐니뭐니해도 영천 장의 큰 비중을 차지한 것은 우시장(牛市場)이었다. 일제 치하에 들어서서 이 우시장은 특히 번창하여 장날만 되면 영천 일대는 소들로 들끓을 정도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