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 책을 만나다] '상실의 시대'…혁명의 상상임신은 끝났다

2016-05-27 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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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실의 시대, 동양과 서양이 편지를 쓰다 | 페르디낭 할아버지 너무한 거 아니에요 | 세계시인선

아주경제 박상훈 기자 =밀린 집안일, TV리모콘과의 손가락 씨름, 아이들과 놀아주기 등 주말·휴일엔 '의외로' 할 일이 많아 피곤해지기 일쑤다. 그렇지만 책 한 권만 슬렁슬렁 읽어도 다가오는 한 주가 달라질 수 있다. '주말, 책을 만나다'에서 그런 기분좋은 변화를 느껴보는 것은 어떨까.

◆ '상실의 시대, 동양과 서양이 편지를 쓰다' 자오팅양·레지 드브레 지음 | 송인재 옮김 | 메디치미디어 펴냄

'상실의 시대, 동양과 서양이 편지를 쓰다'[사진=메디치미디어 제공]


"혁명은 끝났고 민주주의가 그 자리를 대체했다. 그렇다고 혁명을 야기한 현실이 개선된 것은 아니다. 권력은 새로운 형태를 띠고 현실을 지배하고 있다. 게다가 혁명을 실천하고 민주주의를 몸소 실현해야 할 시민은 거대 자본과 언론 앞에서 고객으로 전락했다." (본문 271쪽)
청년 시절 체 게바라와 함께 라틴아메리카 혁명에 뛰어든 프랑스의 작가이자 매체학자 레지 드브레(Régis Debray)는 이렇게 "혁명의 상상임신은 끝났다"고 선언한다. 그는 또 "혁명과 달리 민주주의는 그 의미가 모호하다"며 "이 틈을 파고드는 자본과 권력을 경계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한편 중국 철학계에서 '트러블메이커'로 일컬어지는 자오팅양(趙汀陽)은 '인성(人性)의 실망스러운 현실'을 꼬집으며 "자본과 기술에 지배당하며 사는 동안 인간의 감정과 정신은 쇠약해졌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여전히 편안함과 편리함을 누리기 위해 욕심을 부린다"고 현실을 정확하게 진단한다. 

'상실의 시대, 동양과 서양이 편지를 쓰다'는 동서양의 두 사상가가 정치, 종교, 역사, 철학 등의 주제에 관한 12편의 편지를 주고받으며 토론한 내용을 담고 있다.  

혁명에 투신했던 드브레는 미세한 현실에 주목하는 매체학 연구로 '작은 변화'를 이야기하고, 본인 스스로를 '탁상공론의 철학자'라고 여기는 자오팅양은 복수의 진리를 인정하며 개인 중심의 이성에서 관계 중심의 그것으로 초점을 옮기는 모습을 보여준다. 

학술적 은어와 논조를 전혀 사용하지 않는 이 둘의 대화는 감정, 정신, 이상, 자유 등을 '상실'한 작금의 현실 위에 살포시 내려앉는다. 

272쪽 | 1만4500원

◆ '페르디낭 할아버지 너무한 거 아니에요' 오렐리 발로뉴 지음 | 유정애 옮김 | 북폴리오 펴냄

'페르디낭 할아버지 너무한 거 아니에요'[사진=북폴리오 제공]


쓰레기통 불 지르기, 입만 열면 잔소리, 분리수거 무시하기, 한밤중에 음악 틀어 잠든 아기 깨우기, 초인종 누르는 데 대꾸 안 하기 등등. 사춘기 소년의 철없는 장난 같지만 이는 괴팍한 80대 노인 페르디낭의 일상이다.

소설 '페르디낭 할아버지 너무한 거 아니에요'의 주인공인 이 남자는 세상을 너무나도 잘 알기에 까칠해질 수밖에 없다. 부인과 딸마저 떠나고 애완견 데이지만 남은 처지인 그는 점점 변해가는 세상이 못마땅하다. 이웃과도 이야기 나누기 싫고, 이웃이 자기를 괴롭히는 것은 더 싫다. 이웃들로부터 '건강염려증 할배' '고집불통' '변태' '자기밖에 모르는 안하무인' 등으로 불리는 것도 새삼스럽지 않은 그다. 

그런 페르디낭에게 애완견의 죽음, 자신을 양로원으로 쫓아내려 하는 아파트 관리인 등 일생일대의 위기가 다가온다. 이젠 정말 누구와도 대화하고 싶지 않고, 뭘 먹고 싶지도 않은 상황에 윗층 꼬마 줄리엣이 불쑥 그를 찾아온다. "난 점심 먹으러 왔어요. 난 학교 식당이 싫어요. 난 줄리엣이에요. 이제 할아버지를 페르디낭이라고 부르겠어요. 그게 더 간단하잖아요."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아파트 관리인이 갑작스러운 심장마비로 죽고 그는 살인범의 누명까지 쓰게 된다. 페르디낭은 이 고비를 어떻게 헤쳐갈 수 있을까? 

소설은 '민폐' 주인공이 작은 꼬마, 이웃집 노파 등과 함께 위기를 극복해 가는 과정을 시종일관 따뜻한 유머로 그려낸다. 

256쪽 | 1만2800원

◆ '세계시인선' 시리즈 호라티우스 外 지음 | 김남우 外 옮김 | 민음사 펴냄

'세계시인선' 시리즈 중 '카프레 디엠'(호라티우스)[사진=민음사 제공]


지난 1973년 이백과 두보의 작품을 실은 '당시선'(고은), 폴 발레리 '해변의 묘지'(김현), 라이너 마리아 릴케 '검은 고양이'(김주연), 로버트 프로스트 '불과 얼음'(정현종) 등 총 4권으로 시작한 '세계시인선'은 낯선 번역어에도 불구하고 국내 독자들을 사로잡았다. 이른바 '시문학 르네상스'의 시대였다. 

번역 대부분이 일본어 중역이던 시절 제대로 된 원전 번역을 시도했던 세계시인선은 우리나라 번역 수준을 한 단계 높이는 데 기여했고, 출판 역사상 가장 오랜 수명을 이어 온 문학 총서 중 하나로 자리잡았다. 

한국 중견 시인들에게도 세계시인선은 유의미한 존재였다. 최승호 시인은 "탄광촌에서 초등학교 교사를 할 때 세계시인선을 읽으면서 상상력을 키웠다."고 밝힌 바 있고 김경주 시인은 "시가 지닌 고유한 넋을 폭넓고 진지하게 성찰할 수 있는 기회였다."고 회상했다. 

민음사는 최근 창립 50주년을 기념해 '카르페 디엠'(호라티우스), '꽃잎'(김수영), '애너벨 리'(에드거 앨런 포), '거물들의 춤'(헤밍웨이), '사슴'(백석) 등 총 15권의 세계시인선을 현대적 감각으로 새단장해 내놓았다.

1973년 기획 당시 계획했던 100권 달성이 목표이며, 오는 2017년까지 50권을 출간할 예정이다.

민음사 '세계시인선' 
△ '카르페 디엠'(호라티우스·168쪽·1만원) △'소박함의 지혜'(호라티우스·168쪽·1만원) △'욥의 노래'(156쪽·1만1000원) △'유언의 노래'(프랑수아 비용·116쪽·1만원) △'꽃잎'(김수영·80쪽·9000원) △'애너벨 리'(에드거 앨런 포·100쪽·9000원) △'악의 꽃'(샤를 보들레르·128쪽·1만원) △'지옥에서 보낸 한철'(아르튀르 랭보·140쪽·1만원) △'목신의 오후'(스페판 말라르메·120쪽·1만원) △'별 헤는 밤'(윤동주·96쪽·9000원) △'고독은 잴 수 없는 것'(에밀리 디킨슨·120쪽·1만원) △'사랑은 지옥에서 온 개'(찰스 부코스키·132쪽·1만원) △'검은 토요일에 부르는 노래'(베르톨트 브레히트·148쪽·1만원) △'거물들의 춤'(어니스트 헤밍웨이·92쪽·9000원) △'사슴'(백석·152쪽·1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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