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오달수(47)는 아이러니하다. 단 한 번도 웃기려 한 적이 없지만 극 중 가장 큰 웃음을 책임지고, 묵직한 연기 철학을 가졌지만 움직임은 가뿐하다. 연기 경력 26년 차지만 이제야 첫 주연작을 만나게 되었고, 내로라하는 감독들의 작품을 택할 것 같았지만 신인감독의 데뷔작에 덜컥 이름을 올렸다. 알 수 없지만 알고 싶은 그의 속내. 오달수의 ‘아이러니’를 들여다보았다.
3월 30일 개봉한 영화 ‘대배우’(감독 석민우)는 데뷔 26년을 맞은 오달수의 첫 주연작이다. 대배우를 꿈꾸는 20년 차 무명배우의 도전을 그린 영화에서 오달수는 20년째 대학로를 지키는 무명배우 장성필 역을 맡았다.
러닝타임 108분, 장성필의 자취를 따르다 보면 관객들은 ‘장성필은 곧 오달수’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극 중 장성필의 모습과 오달수가 닿아있는 부분이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달수는 바로 이 점을 가장 경계했다. ‘장성필 이퀄 오달수’라는 공식이 성립될까 봐서였다.
“사실 장성필을 보면서 과거 저의 모습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어요. 그런데 그 감정이 썩 반갑지는 않더라고요. 제가 나서서 와락, 안아줘야 하는데 그렇게 못했죠. 그래서 최대한 장성필이 되려고 했어요. ‘이건 내 이야기가 아니다. 이건 그 사람의 이야기다’하고요.”
마주 앉은 관객과 무대 위 잔잔한 공기, 어려운 주머니 사정이나 함께 술잔을 기울였던 동료들까지. ‘대배우’ 속 인물들은 오달수에게는 너무도 가깝고, 낯익은 사람들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오달수는 자신을 꼭 빼닮은 장성필이라는 인물에게 친근함을, 또 불편함을 동시에 느꼈다.
“사람들은 슬펐던 기억, 괴로웠던 기억을 잘 잊어버려요. 그게 본능적인 건지도 모르겠어요. 저 역시 마찬가지예요. 무명 시절, 정말 힘들었지만 그래도 그 시절을 추억하곤 하잖아요. 그것도 아름답게. 하하하. 극 중 장성필도 그래요. 그때의 추억이 새록새록 떠오르면서도 한편으로는 달갑지는 않고. 복잡한 마음이 들었죠.”
나의 이야기가 아닌, 그의 이야기라고 수도 없이 되뇌었다. 그가 이토록 ‘동일시’를 경계했던 것은 “캐릭터를 입기가 어려워서”였다. 그는 “과거 무명시절 겪었던 비슷한 상황 속 불쑥불쑥 실제 모습”이 튀어나오는 것을 느꼈다. “연기가 아닌 진짜 내 모습이 나오는 것”이 문제였다.
“극 중 장성필이 연기론을 펼치는 장면이 있어요. 갓 극단에 들어온 막내가 ‘대사 있는 연기’를 하고 싶다니까 장성필이 ‘난 개 역할 한 지 20년 됐다’며 핀잔을 주는 신이죠. 거기에서 장성필이 연기에 관한 이야기를 늘어놓는데 실제 제 모습이 튀어나오는 거예요. ‘연기란 말이야’하고 일장연설을 하는데 저도 모르게 제 속마음을 털어놓게 되었죠. 이 장면은 순전히 제 애드리브였어요. 석민우 감독이 컷도 안 하고 내버려두니까 몇십 분을 떠들었죠. 나중에 석 감독이 ‘괜찮다’며 계속 가자고 해서 곤혹이었어요. 나중에 다른 앵글로 찍어야 하는데 제가 무슨 소릴 했는지 기억이 안 나더라고요. 하하.”
장성필과 후배의 진중한 ‘연기론’이 떠올라 “오달수 역시 후배들에게 ‘일장연설’하는 스타일이냐”고 묻자, 그는 단박에 고개를 가로젓는다. “말해봐야 소용없다”는 것이 연기경력 26년 차 선배 배우의 입장이었다.
“가능한 그런 얘기를 잘 안 해요. 복장 터질까 봐 말을 안 한다는 건 아니에요. 하하하. 그냥, 언젠가 스스로 깨닫기를 바랄 뿐이죠. 스스로 깨달을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요.”
앞선 기자간담회 및 인터뷰에서 석민우 감독은 ‘대배우’가 배우 오달수에게서 비롯된 영화라고 밝혀왔다. 오달수에 대한 존경심에서 비롯되었고, 배우들을 위한 존경을 담아 완성하고 싶었다는 말이었다. 오달수를 향한 석민우 감독의 애정은 10년 만에 결실을 보게 되었다.
박찬욱 감독의 조감독이었던 석 감독은 오달수에게 “입봉작의 주인공이 되어달라”고 요청했고 오달수는 흔쾌히 이를 수락했다. 인사치레로 끝날 수 있었던 약속은 10년 후 ‘대배우’라는 영화로 완성되었고 깊은 의미를 더할 수 있었다.
“시나리오를 받기 전부터 이미 오케이(OK)를 한 상태였어요. 슥 지나가면서 약속한 게 더 오래 남더라고요. 꼭 지켜야 할 것 같고요. 하하. 출연하겠다고 약속하고 나중에 캐릭터나 스토리에 대해 전달받았어요. 박찬욱 감독이 먼저 시나리오를 읽고 ‘(이 역할은) 오달수가 딱이네’라고 했다고 들었어요.”
그는 석민우 감독에 대해 “듬직하고 믿음이 간다”고 했다. 조감독 시절부터 만나온 석민우 감독에 대한 신뢰와 애정은 두텁고 단단해 보였다.
“사실 현장에서 배우가 가장 많이 만나는 사람은 조감독이에요. 분장 상태나 컨디션 등 조감독이 항시 체크해주거든요. 그때부터 석민우 감독은 믿음직스럽고 듬직했어요. 확실히 좋은 감독 밑에 있어서 그런지 내공도 있었고요.”
오달수의 오랜 팬이자, 가까운 곳에서 그의 연기를 지켜보았던 석 감독인 만큼 ‘대배우’ 속 장성필은 딱 오달수를 위한 캐릭터였다. 석민우 감독은 오달수가 마음껏 연기할 수 있도록 밑그림을 그려놓은 셈이었다.
“그동안은 짧은 호흡의 연기를 해왔다면 ‘대배우’는 긴 호흡으로 연기를 이어가야 했죠. 매일 석 감독과 이야기를 나눴어요. 하루하루 몰입하고 집중하다 보니 육체적으로는 힘들어도 정신적으로는 만들어간다는 성취감이 들더라고요. 영화를 찍고 돌아보면서 여러 생각이 들었어요. 연기로 부족한 부분이나 스펙트럼에 대한 것들이요. 이번 작품은 제게 ‘복기’하는 시간을 준 작품이기도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