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산15주기]정치의 한계···국익을 위한 경제성과로 극복

2016-03-22 10:45
  • 글자크기 설정

아산의 생애 (하) - 아산의 ‘인정투쟁’

청운동 자택에서 계동 현대그룹 사옥으로 걸어서 출근하는 아산. (뒷줄 왼쪽부터)몽구, 몽윤, 몽준, 몽혁 등이 따르고 있다.[사진=아산정주영닷컴]


아주경제 채명석 기자 = “기업을 하면서 수많은 정치 지도자, 정치인들을 만났지만 마음으로 존경할 만한 정치인다운 정치인을 만났던 기억이 별로 없다. 내가 지금까지 보아온 우리나라의 지나간 권력들은 무분별, 무경우, 무경험이 대부분이었다.”

아산(峨山)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자는 정치, 정치인들을 지독히 불신했다. “큰 기업은 덮어놓고 부정 축재와 정경유착의 본산지라는 부정적인 편견도 잘못된 정치가 만들어 놓은 것”이라고 주장했을 정도다. 아산은 평소 자신을 이윤을 쫓는 장사꾼이 아니라 도덕적으로 우월한 정체성과 지위를 가진 존재로 인식하고 있었기에, 정치권의 기업인에 대한 평가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것이었다.
왕혜숙 연세대학교 동서문제연구원 연구교수는 ‘발전국가와 기업 - 아산의 인정투쟁’란 제목의 논문에서 아산의 사례를 통해 도덕적 차원에서 발전국가와 기업 간 갈등을 주목했다. 왕 교수는 “이들의 갈등은 물질적, 경제적 이익을 둘러싼 경제투쟁이나 정치적인 의미의 자율성(권력) 투쟁이 아니라, 서로에게 국가에 헌신하는 도덕적 지위를 강제하는 동시에 인정받고자 했던 도덕적 갈등”이라고 설명했다.

아산은 스스로를 국가의 발전을 위해 나라의 살림을 맡고 있는 선비로서 규정했다. “우리의 기업인 선비들이 일으키고 이루어낸 것이다”라는 그의 말 속에 이 같은 생각이 담겨있다.

다만, 아산은 모든 기업인들이 자신처럼 공동체를 위해 헌신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며, 자신과 같은 애국애족을 하는 선비 기업인과 그렇지 않은 기업인들을 의도적으로 구분했다. 즉, 스스로를 도덕적으로 ‘정화’하기 위해 상대적으로 다른 기업인들을 ‘오염’시키는 전략을 활용했다는 것이다. “애국애족을 위해 나라의 살림을 사리사욕 없이 관리하는 청지기이며, 이러한 기업인들로 구성된 자본주의야 말로 진정한 자본주의”라는 말을 실천한 선비 기업인을 ‘성(聖)’의 영역에, “사적인 이익만을 추구하는 장사꾼으로 정권과 결탁해 성장하며, 이자를 받아 재산을 불리는 악성 자본주의”를 만들어낸 장사꾼을 ‘속(俗)’의 영역으로 분류하고, 이를 기반으로 자신을 다른 기업인들과 차별화하는 전략을 사용했다.
 

[자료=왕혜숙 연세대학교 동서문제연구원 연구교수]


문제는 아산 스스로가 가지고 있던 다른 기업인들과 차별화된 정체성과 달리 한국사회에서는 ‘성’스로운 기업인들마저 ‘속’스러운 기업인들과 같은 취급을 당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는 원인을 정치라고 봤다. 황 교소는 “아산은 자신을 포함한 건실한 기업인들이 한국사회로부터 제대로 된 지위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는 이유에 대해 정치의 책임을 묻고 있다”면서 “정권에 의해 비천하게 여겨진 기업가 집단의 손상된 정체성에 대한 사회적 인정을 요구하는 발언들은 ‘인정투쟁’의 전형으로 해석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자신을 포함한 성스러운 기업인들에 대한 폄하된 정체성을 바로잡고자 하는 아산의 인정투쟁은 현실적인 차원에서 누가 더 국가발전에 기여하는가라는 경쟁의 차원으로 전환된다. 기업인이 자신의 왜곡된 정체성을 수정하고 자신들의 지위를 사회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국익을 위해 가장 효율적인, 더 나은 경제적 성과를 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인정투쟁은 다른 기업들은 물론 정부와도 수많은 갈등과 경쟁으로 현실화됐다.

1967년 소양강댐 건설이 대표적인 사례다. 대일청구권자금으로 지어진 소양강댐은 일본 측의 의도대로 당초 콘크리트 중력댐으로 설계됐다. 아산은 강 주변에 널린 흙과 모래, 자갈을 이용한 사력댐으로 설계 변경을 요구했다. 목전의 손해에 대한 경제적 계산 때문으로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는 계기일 뿐 근본적인 동기는 국내 기업과 국내 기술진에 대한 무시, 일개 청부업자로 치부하는 모욕에 대한 저항이었다. 그는 이러한 무시와 경멸에 대항해 국내기업도 순수한 국내 기술력으로, 더 저렴한 비용으로 성과를 낼 수 있다는 능력을 인정받고자 했다. 아산은 “건설업자로서 조금이라도 국가 예산을 절약”함으로써 “나라의 발전을 위해 그만큼 기여”한다는 인정을 받고자 했던 것이다.

황 교수는 “인정투쟁의 관점에서 볼 때 정권 초기 그와 정부와의 갈등들은, 그가 단순히 불합리한 정권의 정책에 저항하는 것을 넘어서 당시 정권과 한국사회가 기업인들에게 일방적으로 부여했던 부정적인 정체성에 대항해 긍정적인 정체성(선비, 애국애족)을 형성하고자 했던 인정 투쟁으로 해석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아산은 정권에 대한 뿌리 깊은 불신과 우월적 지위의식을 평생 가지고 있었지만 박정희 정권에게만은 그나마 우호적으로 협조를 했다. 황 교수는 박정희 대통령이 기업인들에게 경제적 이익, 정치적 권력을 주었기 때문이 아니라, 도덕적 지위를 주었기 때문이라고 해석했다.

박정희는 민족주의적 아젠다를 설정하고 기업인들을 국익을 위해 봉사하는 도덕적 행위자의 정체성을 갱신시켜주는 도덕적 장치들을 활용했다. 즉, 성과 속의 기업들을 선별하기 위한 ‘지위경쟁’과 이 경쟁에서 인정을 받은 기업들을 도덕화하는 ‘전시적 의례’(display rituals)를 마련한 것이다.

산업훈장의 제도화를 통해 기업들은 사적 이익을 추구하는 탐욕스러운 자본가를 넘어 국가와 사회 전체의 발전에 이바지하는 산업역군으로 도덕적으로 합리화될 수 있었다. ‘수출의 날’과 ‘상공의 날’과 같은 기념일 지정은 수출실적이 단순히 한 기업가나 기업의 이익에만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 모든 국민과 국가 전체가 지켜보고 있는 국가적 관심사라는 의미가 부여됐다. 아산은 바로 이러한 국익을 기준으로 한 경쟁을 통해, 이윤을 고려하지 않은 사업(통일로 공사, 조선소 사업, 방위산업)에 참여한 결과, 국가발전에 이바지하는 기업인이라는 도덕적 지위와 인정을 획득했다.

황 교수는 “아산의 사례는 발전국가와 재벌 사이의 갈등이 단순히 기업지배에 대한 이해관계 때문이 아니며, 그 이면에 도덕적 고려가 존재함을 암시한다”면서 “이는 자신의 정체성과 지위를 국가와 사회로부터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 지위를 증명하기 위한 경쟁에서 나타나는 갈등이다”고 전했다.
 

©'5개국어 글로벌 경제신문' 아주경제.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0개의 댓글
0 / 300

로그인 후 댓글작성이 가능합니다.
로그인 하시겠습니까?

닫기

댓글을 삭제 하시겠습니까?

닫기

이미 참여하셨습니다.

닫기

이미 신고 접수한 게시물입니다.

닫기
신고사유
0 / 100
닫기

신고접수가 완료되었습니다. 담당자가 확인후 신속히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닫기

차단해제 하시겠습니까?

닫기

사용자 차단 시 현재 사용자의 게시물을 보실 수 없습니다.

닫기
공유하기
닫기
기사 이미지 확대 보기
닫기
언어선택
  • 중국어
  • 영어
  • 일본어
  • 베트남어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