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경제 채명석 기자 = ‘세계무역기구 정부조달협정(WTO GPA)’이라는 제도가 있다.
WTO GPA 가입 국가들은 중앙정부·지방정부·공기업 등 관련기관의 발주 공사입찰에 동등한 조건을 부여해 시장진입의 장애요소를 철폐한다는 것이 주요 골자다. 국교단절 등의 정치적인 이유가 있더라도 가입국간에는 입찰 참여가 가능하도록 해야 한다.
◆중앙·지방 공기업 모두 개방
다자간 통상교섭인 WTO와 양자간 교섭인 자유무역협정(FTA) 체제에 부응하기 위해 통상 부문의 개방 확대는 피할 수 없는 현실이다. 다만, 국내 철도차량산업이 처한 상황을 조금이라도 이해하고 배려했다면 어느 정도 보완책을 마련할 수 있었지 않나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철도차량산업은 막대한 자본과 기술이 요구되는 국가기간산업이다. 철도차량은 다른 수송기관과 달리 철도 선로 위에서만 주행하고, 차량부품 또한 그 철도차량에만 소요되는 것이므로 철도차량 부품에 대한 수요도 기본적으로 철도라는 사회간접자본에 의해 제약을 받는다. 가장 큰 특징은 철도차량 및 부품산업은 주문생산 및 다품종 소량생산이라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주문과 입찰에 의해 시장이 형성되므로 수주를 해야 일감을 얻을 수 있다. 이러다보니 사전 계획 생산 및 납기 조정이 어려우며, 가격을 인하해 수요를 증가시킬 수도 없다. 규모의 사업을 전개할 수 있느냐 없느냐가 산업의 경쟁력을 좌우한다.
그런데, 한국 철도차량의 시장 규모는 연간 5000억~6000억원 수준으로 전 세계 철도차량 시장 규모인 약 72조원의 1%도 미치지 못한다. 규모의 사업을 전개할 수 없다.
시장이 작으니 철도·부품기업들의 기술개발 투자 여력이 충분하지 않고, 인력 양성이 어렵다. 시장의 변동성이 커 업체들의 경영 상황이 타 산업에 비해 불안하고 실제로 악화 상태인 경우가 많다. 철도차량산업에 참여하고 있는 전체 기업의 95% 이상이 종사자 수 50명 이하의 중소·영세업체라는 점이 이를 반증한다. 이런 가운데에서도 생산하는 철도차량 모델수가 많은데 발주는 소량이며, 이 또한 발주가 불규칙적으로 이뤄지는 등 다양한 문제점이 복합적으로 얽혀있다.
◆운영사의 경영악화도 산업 발전 걸림돌
철도차량의 고객인 철도 운영사들의 경영환경 악화도 주목해야 한다. 철도 이용요금이 서민 물가에 직접 연관되는 관계로 요금인상은 되도록 억제되는 바람에 투자금 회수 및 운영비용 확보가 여의치 않다. 20년 이상 사용한 낡은 철도차량 교체비용도 마련하기 쉽지 않은데다가, 정부로부터 신규 노선에 투입되는 철도차량 구매 시에만 40~60%의 국고를 지원받을 수 있고, 교체차량은 자체 자금으로 확보해야 하기 때문에 비용 부담이 크다.
결국 오래된 객차를 운영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됐으나 이 또한 고민이다. 철도 운영사는 해가 갈수록 차량유지보수 비용 증가 부담이 크다. 철도차량 및 부품업체들도 철도 운영사들에게 공급할 소모품 등 관련 부품을 수 십 년간 생산해야 하기 때문에 생산설비를 유지하고 재고를 안고가야 하는 부담 또한 크다. 특히, 오래된 철도차량을 장기간 사용할 경우 좁은 시장에서 새로운 기술을 적용하기가 어려우므로 기술 경쟁력 약화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이런 가운데 정부가 철도차량 산업을 WTO GPA 양허대상에 포함시킨 것이다. 철도차량의 반대 의견은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업계 관계자는 “WTO GPA 협상 당시 철도차량 개방건은 회원국간 협의사항이었을 뿐 정부가 업계의 의견을 반영한 것은 거의 없다”면서 “산업 규모가 크지 않다 보니 우리는 그저 ‘원 오브 뎀(협상 타결을 위해 제시한 카드 중 하나)’였다”고 아쉬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