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경제 채명석 기자 = 상남(上南) 구자경 LG 럭키금성그룹 회장(현 LG그룹 명예회장)은 평소 대리점이나 서비스센터, 공장 등 고객들과 만나는 현장을 직접 챙기길 좋아했다.
그런 그가 서울 영동 서비스센터에서 주부들과 대화를 나눌 기회를 마련했다.
“세탁기 뚜껑 좀 튼튼하게 만들어 달라. 우리 아이들은 옷을 벗어서 세탁기로 휙 던지는 습관이 있는데 뚜껑이 약해서 자꾸 부러진다.”
“대형 냉장고는 주부들이 옮기기가 어렵다. 바퀴 좀 달아달라.”
“고무 패킹을 냉장고 뒤쪽에 달아달라. 설치할 때 냉장고나 벽이 덜 상할 것 같다.”
뭔가 첨단기술을 요구할 것이라 예상했던 상남은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막상 주부들이 진지한 표정으로 요구한 것들은 손쉽게 해결해줄 수 있는 사소한 문제였다.
그는 사업에 투신하면서 “첨단기술을 개발해 국민에게 최고 수준의 제품을 싸게 공급하는 것이 기업을 경영하는 사람의 역할이다”라고 생각했다. 시장 개방이 임박한 1990년대에 이르러서는 “개방의 파고를 뛰어넘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외국의 우량 기업들과 기술 격차를 줄이는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런데 고객을 만나 보니, 앞선 기술만이 능사가 아니었다. 주부들과의 대화를 통해 상남은 앞으로 자신과 회사가 추구해야 할 바가 뭔지 분명히 알게 됐다.
‘고객들은 기업이 일방적으로 개발하는 첨단기술보다, 사소할지라도 자신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얼마나 충실히 담아내는가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구나! 앞서나가는 기술, 원천 기술을 확보하는 것에도 게을리해선 안 되지만, 그 기술에 고객에 대한 배려를 담아야 한다.’
이후 그는 임직원에게 ‘끊임없는 혁신’과 더불어 ‘고객을 위한 가치창조’를 더욱 강조했다.
“신제품의 아이디어는 대부분 고객에게서 나오니 고객이 우리의 스승이다. 혁신의 바탕에는 고객에 대한 인식의 혁신이 앞서야 한다. 오직 이 길밖에 없다.”
연암(蓮庵) 구인회 LG그룹 창업자의 장남인 상남은 1970년 LG그룹 회장으로 취임했다. 그는 “후계자는 언제나 선대보다 더 잘해야 한다고 하지만 선대가 이루어 놓은 업적을 지키는 것도 중요한 일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오직 내실을 위하여 차근차근 경영해 나갔다”고 말했다.
상남은 회장 재임 25년간 그룹의 매출액을 무려 2500배나 성장시켰다. 또한 ‘21세기를 향한 경영’을 구상하며 정보화시대 제3의 산업 혁명기를 성공적으로 맞이할 수 있도록 기반을 닦았다. 상남이 재임기간 중 가장 강조한 것은 ‘자율경영’과 ‘고객을 위한 가치창조’였다. 특히 그는 고객을 위한 가치창조를 위해 늘 솔선수범했다.
1994년 아들 구본무 회장에게 자리를 물려준 상남은 기업이 살아남으려면 ‘오직 고객에서 답을 찾는 길’ 뿐이라고 강조했다. 또 하찮은 토끼 한마리를 잡는 데도 최선을 다하는 호랑이처럼 “과연 지금 나는 이 의사결정에 최선을 다했는가?” 하고 항상 자문했다고 한다.